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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실버 그레이 그리고 법

입력시간 | 2017.09.14 06:00 | 선상원 기자  won610@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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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근 서울남부지방법원 부장판사] 회색은 억울하다. 사람들이 즐겨 입는 옷 색깔이고, 건물이나 가전제품의 외장으로 가장 많이 선택되는 색인데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많다. 흔히 존재감 없는 사람을 회색에 비유하고, 기회주의자를 회색분자라고 부른다. 인간의 소외와 도시의 고독은 회색으로 표현되고,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서는 회색의 신사들이 현재의 시간을 빼앗아가는 악당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회색 전체가 그렇게 음울하고 개성 없는 색은 아니다. 채도(彩度)가 없이 명도(明度)만 가지고도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는 회색이야말로 세련된 색깔이라고 할 수 있다.

[목멱칼럼]실버 그레이 그리고 법
나는 연한 회색을 좋아한다. 진한 회색은 칙칙하고 무겁지만, 연한 회색은 밝으면서도 차분한 느낌을 준다. 주로 바탕색으로 쓰여 다른 색을 돋보이게 하는 매력이 있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같이 튀는 색깔의 배경으로는 연한 회색이 깔끔하다. 검정색 바탕에 원색을 찍으면 선명하긴 하지만 부담스럽고, 흰색 바탕에 원색을 찍으면 처음엔 깨끗하지만 이내 빛이 바래고 만다. 다만 연한 회색은 다른 색과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자칫 번지거나 섞이면 양쪽 모두 지저분한 무채색이 될 뿐이다.

연한 회색이 빛을 받으면 푸르스름하게 반짝이기도 한다. 「패션전문 자료사전」에서 그 색의 이름을 찾았다. 연한 청색 빛을 띤 은백색을 ‘실버 그레이(silver gray)’라고 부르고, 1607년에 색의 공식 명칭으로 채택되었다고 한다. 연한 회색에 때가 묻으면 거무튀튀하게 우중충해지고, 광택이 나도록 잘 닦아 주지 않으면 청색 빛을 머금은 실버 그레이가 되지 못한다. 실버 그레이는 단순히 하나의 색이 아니라 부단한 관리와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사람을 실버 그레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고 인격을 갖추어야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찬사이다.

나는 연한 회색이 법(法)에 가장 어울리는 색깔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주목을 받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쟁점이 빨강, 파랑, 노랑, 초록 같이 선명한 색깔이라면, 그 배경에 항상 깔려 있는 법에는 연한 회색을 입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연한 회색을 칠한 벽면과 바탕화면처럼 법은 사회의 단단한 벽이자 차분한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법이 회색의 영역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빛을 받으면 청색을 내뿜는 실버 그레이처럼 때로는 서슬 퍼런 위엄도 있어야 한다.

법률가는 단순히 하나의 직업이 아니다. 사람들은 법률가에게 직업인으로서의 성실함 이상의 것을 기대한다. 당장 다루는 사건 하나가 과거의 바탕과 미래의 배경으로 남고, 현재의 세상을 뒤집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률가들이 지나치게 주목을 받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필요한 때에 시대정신을 선언하지 못하고 회색의 지대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국민은 법률가들이 사회의 바탕과 배경뿐만 아니라 가끔은 한줄기 빛을 뿜는 실버 그레이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법률가들 앞으로 사건 하나에 철학과 양심을 걸어야 하는 과제들이 밀려오고 있다. 세상이 원할 때는 날선 검(劒)의 역할을 해야 한다. 날이 잔뜩 선 곧게 뻗은 검(劒)은 실버 그레이로 빛나면 족하다. 빨강, 파랑 같은 색이 칠해져 있으면 우스꽝스럽다. 그리고 날이 한쪽으로 선 도(刀)를 가지고 거칠게 베어서는 안 된다. 날을 양쪽으로 세운 검(劒)이 되어 정확한 곳을 예리하게 찔러야 한다.

법률가들이 이젠 우중충한 회색의 이미지를 벗고 실버 그레이로 거듭 날 때이다. 세상의 아픔에 눈을 감고 시대의 흐름에 비켜서서 필요할 때 정의를 구현하지 못하면 그건 때 묻은 회색이다. 역사에 대한 고뇌와 인간에 대한 성찰 없이 단지 시류(時流)를 뒤쫓아서는 청색의 빛을 발할 수 없다. 다만 실버 그레이는 다른 색과 섞여서는 결코 아름다워질 수 없다. 스스로 빛을 발해야 아름다울 뿐이다. XM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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