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본드는 왜 슈트를 벗지 못하나

400년 전 탄생한'서구문명아이콘'
신사복 얽힌 철학·정치·경제 논리
英 문화사학자가 한 땀씩 풀어내
▲모던 슈트 스토리
크리스토퍼 브루어드|308쪽|시대의창
  • 등록 2018-11-21 오전 12:12:00

    수정 2018-11-21 오전 12:12:00

영화 ‘007 스카이폴’(2012)에서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배우 대니얼 크레이그. 007 시리즈의 첫 편 ‘007 살인번호’(1962)를 시작으로 근작 ‘007 스펙터’(2015)까지 60여 년을 본드에게 입혀온 슈트는 ‘신화적 지위를 부여하는 갑옷’과 다를 바 없었다(사진=시대의창).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영화에 등장하는 대다수는 위신과 권위, 보수적인 태도 등을 내포한다. 하지만 어떤 조합은 이미 예상된 기능을 초월해 그것을 입은 이들에게 신화적 지위를 부여하는, 갑옷과도 같은 초기능적 실재다.”

400년 전이란다. 이 단단하고 중후한, 함부로 범접할 수 없을 듯한 ‘물건’이 세상에 나온 게. 하지만 의외였다.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신분친화적으로 위상을 바꿔갔으니. 정장이지만 일상복이고 예복이지만 작업복이기도 했다. 그뿐인가. 고위층 관료부터 은행원·성직자·노동자·연예인, 또 법정에 선 피고인까지 계층을 하나로 모으는 ‘유니폼’이기도 했고. 흔히 ‘신사복’이라 불리는 슈트(suit) 얘기다.

17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처음 등장했다. 때마침 불어온 섬유산업 발달의 붐을 타면서 근대 남성성의 전형을 이뤘다. 이후 서구열강이 식민지를 확장하자 세계로, 특히 동·남아시아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이른바 ‘서구 문명의 아이콘’이 된 거다. 그런데 슈트라고 다 같은 슈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요즘 말로 ‘덕후’가 만들고 이끌던 주류가 있었던 건데. “진화론과 민주적 이상향을 물질로 실현한 완벽한 표본”이라고 치켜세웠다. 덕후가 그렇듯 섬세하고 매끈하게 빠진 슈트 한 벌이 그들 사이에선 ‘거룩한 성물’로 추앙받았다.

여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건축가로 패션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는 오스트리아의 아돌프 로스. 1900년을 전후로 신사들의 맞춤옷과 소품 등을 진보적 디자인의 전형으로 자주 소개한 인물이다. 그가 분명히 선을 그었던 지점이 있다. ‘저속한 산업’과 ‘국민’이 만든 열등한 결과물과 경쟁해 이길 수 있는 특징을 찾는 일이었단다. 여기서 ‘저속한 산업’은 여성복을 가리키고, ‘국민’은 독일인을 뜻한다니. 한낱 슈트 한 벌로 성차별에다가 국가·민족 비하까지 서슴없이 자행한 셈이다.

슈트를 고리로 400년 흐름을 한 줄에 엮어낸 이는 문화사학자인 저자다. 영국 출신이다 보니 아무래도 방점은 영국인의 취향에 찍혔다. 옷차림에 관한 한 대단히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그래선가. 오래전 로스가 보였던 편향된 시선을 굳이 거두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슈트에 대한 믿음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편에 기꺼이 다가섰다. 옷감과 가위와 실의 만남을 넘어서겠다는 뜻인 거다. 그렇게 책은 슈트에 봉합한 철학·정치·경제논리를 서둘지 않고 한 땀씩 풀어낸다. 슈트 한 벌로 헤집은 간단치 않은 사회문화사다.

△슈트가 사람을 만든다?

저자는 슈트에 꽂힌 보편성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데 공을 들였다. 가령 ‘바지·재킷·웨이스트코트’란 슈트의 3피스 형태는 지금껏 이어지지 않나. 그러니 400년을 거스른 변화란 게 얼마나 미세하고 정교했던지 가늠할 수 있지 않느냐는 거다. 재킷 한 벌에만 40~50개의 구성요소, 75개의 독립된 공정이 필요함에도 말이다. ‘제작에 대한 고민’도 일관성이 있단다. 그 근거를 저자는 16~17세기 귀족과 그들의 의복을 조달하던 대리인이 주고받은 편지내용에서 찾아낸다. 가격, 원단의 질, 재단·재봉지침, 색상과 유행, 여기에 겸양과 공손까지, 현대 의류업계에서 고심하는 사항과 별반 다르지 않더란 얘기다.

그렇게 태어난 슈트가 다시 ‘사람’을 만드는 과정에도 주목했다. 대중적 인물로 보자. 영화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1962년 첫 편 ‘007 살인번호’를 시작으로 2015년 근작까지 60여 년을 두들겨 맞고 망가졌을 때조차 슈트 발은 빳빳이 세운 상태가 아니었나. 본드로 세운 슈트 핏은 최근 영화 ‘킹스맨’이 이어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주인공은 그 매너를 슈트 입기부터 단속한 듯하다. 난투극을 벌이고 길바닥을 뒹굴어도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니.

한 번쯤 생각했을 수도 있다. 싸우러 나가면서 왜 굳이 불편한 복장을. 하지만 ‘모르는 소리’란 게 저자의 생각이다. 전장에서 갑옷을 어찌 벗어버리겠느냐는 거다. 총알도 비켜갈 상징인데.

하지만 저자가 못내 아쉬워하는 대목도 있다. 본드의 슈트에서 자꾸 약발이 빠지는 느낌이란다. “숀 코너리(‘007 시리즈’ 첫 주인공)의 슈트에 바느질로 새겼던 신중하고 엄중하게 통제된 영국 남성성의 표지”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야망을 표현하는 도구로서의 슈트 역할은 계속되리라 확신한다.

편안하고 유행을 거의 타지 않은 영국인의 슈트.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이젠 제국의 영광이 먼 과거의 일이 돼버린 영국인들의 점잖고 절제된 태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 되었다(사진=시대의창).


△‘현대의 아이콘’은 살아남을 것

물론 슈트에 반기를 든 이들도 있다. 저자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중국의 마오쩌뚱을 우선 꼽는다. 슈트 자체보단 슈트가 뿜어내는 상징에 저항한 이들인 셈인데. 간디는 빼앗긴 권력을 되찾겠다는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사소한 옷을 자처했다고 풀어냈다. 중국에선 ‘마오슈트’란 인민복이 그 구실을 했단다. 현대 중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쑨원이 만든 그것을 마오쩌뚱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만들었다.

슈트가 굳이 남성만을 위한 옷도 아니었다. 이미 1860년대부터 활동하는 여성이 늘면서 생긴 변화였다. 처음부터 정교하진 않았다. 남성의 군복이나 운동복을 변용했던 거니. 그럼에도 풍족한 서구여성의 구미는 당겼던 듯하다. 부작용은 엉뚱한 데서 튀어나왔는데, 슈트를 입은 여성에게 동성애 이미지를 씌운 거다. 이와 맞물려 저자는 슈트의 문화사에 점점이 찍힌 여성혐오·비하의 역사까지 들춰낸다. 로스가 그랬듯,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부지에 역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직접 쓴 이 문장. “넘치게 장식돼 있는 것은 언제나 쓰레기다. 명품은 깔끔하고 깨끗하고 순수하고 건강하다.” 여기서 단순하고 건전한 건 ‘남성적인 것’이고, 장식적이고 천한 건 ‘여성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슈트의 미래는 어찌 펼쳐질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저자의 답. 현란하고 난삽하고 불가사의한 이국적 정취의 ‘공작새’들 판이지만 시간을 초월해온 적응력을 여전히 믿는다는 거다. 왜? ‘현대성의 아이콘’이니까. 일단은 기술력. 보디스캐닝, 얼룩이 묻지 않는 방수, 폭력을 막거나 대량 데이터를 전송하는 기구로도 고안 중이란다. 하지만 이보단 누군가에게 직접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캔버스를 제공한 역할이 크다고 했다. 패션·섬유디자이너든 예술가든 영화감독이든.

책 곳곳에 박은 사진·그림이 볼거리를 보탰다. 수십 권에서 뽑아낸 자료는 탄탄한 구성력을 갖췄고. 다만 세계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오류는 아쉬운 대목이다. 역사가 저자의 서술방향처럼 일방통행이었다면 정작 슈트는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잘 뽑힌 슈트’ 한 벌은 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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