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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번쯤 칠하면 기억이 붙잡을 수 있으려나'

안광식 '자연-일기' 전
스케치 한 뒤에 지우고 다시 그리고
50여차례 반복해서 불러들인 '기억'
초현실적 강가풍경 수려한 꽃정물로
선화랑에 신작 45점 걸어…23일까지
작가 안광식이 자작나무가 한 줄로 늘어선 아련한 기억 속 물가를 끄집어낸 회화 ‘자연-기억’(2017) 곁에 섰다(사진=오현주 선임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현실적이지 못하다. 초현실적인 풍경이다.” 그 고백은 사실처럼 보인다. 이 거칠고 치열한 시대에 꽃병 한가득 꽂힌 들꽃 무더기가 웬말이며 수면과 맞닿은 수풀, 한 줄로 곱게 세운 자작나무가 무슨 의미랴.

그런데 묘한 일이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마법처럼 사라진다. 오늘 나를 흔들어놓은 근심과 어제 나를 울분케 한 온갖 사회부조리까지 다 잊힌다. 고요히 가라앉힌다.

화가 안광식(45)은 아련한 기억을 그린다. 이를 위해 그가 가져온 것은 이름 모를 들꽃, 꿈에서나 봤을 풍경, 도톰한 항아리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없다고 했다. 자연스러움을 좇다 보니 그곳에 이르렀을 뿐이라고.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선화랑. ‘자연-일기’(Nature-Diary)란 테마로 열고 있는 안 작가의 개인전에는 순수하다 못해 순진한, 착하다 못해 바보스러운 그림 45점이 걸렸다. 그런데 전시를 꼼꼼히 둘러본 뒤라면 상황은 확연히 달라진다. 정작 ‘순진한 바보’가 되는 건 작가도 그림도 아닌 관람객이니까.

안광식 ‘자연-일기’(2017). 50호(116.7×91.0㎝) 크기의 캔버스를 차지한 건 이름모를 들꽃과 달항아리뿐. 스톤파우더로 지우고 유화물감으로 그리기를 50여차례 반복해 완성했다(사진=선화랑).


가까이 다가가 봐야 안다. 얼마나 숱한 붓질로 이뤄낸 정물이고 풍경인지. 얇은 한지를 쌓아 올리듯 한 겹씩 쌓으며 수십 차례의 겹칠로 완성을 본 작품이다. 그저 쌓는 일만이 아니다. 지우기도 한다. 스케치작업이 끝나면 모든 것을 ‘스톤 파우더’란 돌가루 용액으로 지워버린다. 규석·활석을 물감에 섞어 그가 직접 만들었단다. 그래도 잔상은 남는 법. 남은 그 잔상을 복원하는 그림을 그는 또 그린다. 구체적으로는 드리핑(dripping)이다. 물감을 캔버스에 뚝뚝 떨어뜨리는 기법. 그렇게 기억의 형상이 점점 모양을 갖춰간다.

그 미친듯한 반복이 보통 50여차례다. 출퇴근하듯 하루에 꼬박 10시간씩 작업하고, 작품 한 점의 끝을 보는 데 족히 한 달은 걸린단다. 웬만한 육체노동이 거기에 미칠까.

그토록 어렵게 그림을 세상에 불러내는 건 소년시절의 기억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실체를 끄집어낸 건 아니다. 이제는 희미해진 배경만 옮겨와 풍경화로 앉힌다. 초점은 빛에 뒀다. 이유가 있다. “태양이 가장 좋은 각도에서 비출 때 물결이 가장 아름답다. 그러다가 스스로 사그라진다. 인생사와 닮지 않았나.” 그는 ‘윤슬’을 말한 거다. 해와 달이 비추는 대로 찬란할 때도 기울 때도 있는 물결의 흔들림.

안광식 ‘자연-일기’(2015). 햇빛이 비추는 잔물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진다. 스톤파우더로 지우고 유화물감으로 그리기를 50여차례 반복해 100호(162.0×97.0㎝) 크기의 캔버스를 아득한 몽환으로 채웠다(사진=선화랑).


정물화에선 가장 좋지 않은 구도로 다들 기피한다는 정면구도를 택했다. 옛 모습을 똑바로 다시 들여다보자는 작정에서였단다. “보잘것없는 대접을 받는 들꽃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대구 출신 투박한 경상도 남자의 어떤 독백이 이보다 진지할까.

아득한 몽환. 어차피 기억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 정작 그가 게워내고 싶어 한 기억이 무엇인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최면에 걸린 듯 빨려들어 헤어나지 못할 위기가 엄습한 순간 가까스로 몸을 돌려 세웠다. 전시는 2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