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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섭 칼럼] ‘죽은 정권’ 적폐 캐기

이명박·노무현 두 전임 대통령이 나란히 도마에 올랐다. 이 전 대통령이 재임 중 국정원 댓글공작 및 연예인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수사 대상으로 지목된 반면 노 전 대통령은 자살에 이른 동기가 논란을 빚고 있다. 두 사람에게 각각 판도라 상자로 남아 있던 BBK 사건과 640만 달러 뇌물사건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심판을 받은 데 이어 구속 상태에서 법정에 불려 다니는 모습을 감안하면 전직 대통령들의 수난시대라 부를 만하다.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논란이 ‘살아 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 사이의 치열한 싸움에서 빚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칼자루를 쥔 쪽에서는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고 내세우는데 비해 상대방은 ‘정치 탄압’이라고 반발하는 것이 그런 배경에서 기인한다.

물론 혐의가 드러났는데도 없었던 것처럼 덮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대통령을 지냈다고 해서 잘못을 용인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친인척까지 털어서 과연 먼지가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정치철학과 소신에 따라 정책을 펴 나가는 과정에서 부작용과 마찰이 불거지기 마련이다. 이념 대립이 첨예한 여건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꼬투리가 잡힐 수밖에 없고 상대측의 고소·고발에 따라 검찰 수사로 넘겨지게 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새 대통령의 임기 시작에 따라 직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물러나오면서 빌미가 될 수 있는 서류를 모조리 폐기 처분하는 사례에서도 지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보수·진보 간의 정권교체 경우만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로 넘어갈 때가 다르지 않았다. 논란의 소지를 남겨서 이로울 게 없다는 경험칙 때문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이념 성향에 따라 찢겨지고 구겨진 모습으로 평가되는 것도 이러한 현상과 무관할 수 없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이 진보세력에 의해 여전히 적폐 대상으로 간주되듯이 보수진영 또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의 치적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가면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이런 대립 구도에서는 영원히 내 편, 네 편일 뿐이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도 보수·진보의 대결 구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릇된 정치적 유산을 청산하는 작업이 잘못일 수는 없다. 국민 화합을 위해서도 과오는 과감하게 바로잡아야 한다.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임기 초에 높은 지지율을 누렸던 것도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개혁 추진에 있었다. 재산공개로 부정부패 공직자들을 추방했고, 군 요직을 독점하던 하나회 출신들을 걸러냈다.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과 관련해 전두환·노태우 두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운 것도 김 전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마냥 과거 청산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게 우리 처지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떠나서도 급변하는 국제사회 흐름에 능동적으로 쫓아갈 필요가 있다. 세계를 둘러싼 경제 여건도 만만치는 않다. 여야 간 협치가 필요하고, 기업 협조가 절실하며, 국민들의 국정 동참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군부독재 시절의 적폐를 성공적으로 청산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지도가 급락했던 것도 결국 내치에 실패하면서였다. 그가 퇴임하면서 남겼던 “영광의 순간은 짧았고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는 탄식을 되새겨야만 한다.

정치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임 대통령의 가슴에 ‘주홍 글씨’가 새겨지게 된다면 미래 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 정치 지도자들의 관심이 여전히 10년 전에 머무르고 있는 지금 현실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