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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섭 칼럼] 링컨의 성경, 트럼프의 성경

노예해방을 선언했던 링컨의 정치철학과 이념을 백악관으로 다시 불러들인 것은 도널드 트럼프 자신이다. 의회 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링컨의 성경책을 등장시켜 엄숙히 취임선서를 했다는 자체가 상징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156년 전 인간의 선한 본성에 호소한 링컨을 본받으려 했다”는 게 대통령 취임준비위원장을 맡았던 톰 버락의 얘기다.

트럼프가 취임사에서 성경 내용을 거론한 점도 눈길을 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뭉쳐서 살아갈 때 얼마나 선하고 기쁜가’라고 말한다”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링컨 성경에 자기의 성경을 겹쳐놓고 선서를 했다는 사실도 특이하다. 어려서 교회 주일학교를 졸업할 때 어머니가 그에게 선물한 성경책이다. “내겐 매우 특별한 책”이라는 트럼프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트럼프가 취임한 지 불과 2주일밖에 지나지 않아 이미 전 세계가 당혹과 긴장에 처해 있다. 그가 내세우는 ‘미국 우선주의’의 파장이다. 예상하지 않은 바 아니지만 일탈 정도가 예상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그 터널의 끝이 어디일까를 두고 일종의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다.

트럼프의 목표가 틀렸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되살려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지극히 당연한 약속이다. 그 이면에 노골적인 영토전쟁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게 문제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재협상 및 탈퇴 방침부터가 제멋대로다. 포드, 도요타와 삼성, LG에 이르기까지 미국 투자를 이끌어낸 방식도 거의 우격다짐이었다.

더욱이 무슬림의 입국을 거부하는 ‘반(反)이민’ 행정명령은 선전포고에 가깝다. 종교와 인종 차별의 화약고에 불을 붙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해당국들은 물론 세계 각국이 트럼프에게 일제히 등을 돌렸다. 아니, 미국이 그동안 자랑으로 내세웠던 인류애적인 보편 가치에 대해 스스로 반기를 든 모양새다.

심지어 전임 대통령인 오바마까지 나서서 “미국의 가치가 위태로워졌다”며 반대 성명을 발표한 마당이다. 그가 역대 대통령 가운데 트럼프에 앞서 링컨 성경을 취임선서에 처음 사용한 주인공이라는 점에서도 대비를 이룬다. 똑같은 성경책에 손을 얹어 선서를 하고도 행동 방식은 서로 어긋나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트럼프가 취임하자마자 오바마의 중점 정책이던 오바마케어의 대폭 수정 방침을 밝힌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트럼프의 도발은 중국·일본·독일 등 주요국들에 대한 환율전쟁 포문으로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이들 국가들의 환율조작으로 미국이 얼간이처럼 착취당했다”는 원색적인 표현에서 그의 ‘싸움꾼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시비는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한국에도 조만간 먹구름이 몰려올 것이라는 게 걱정이다.

이로써 그가 주장하는 ‘미국 우선주의’의 윤곽이 분명해진 셈이다. 인권, 화합, 신뢰 등 전통적인 가치보다는 달러화의 위력을 앞세우겠다는 발상이다. 주먹을 휘둘러서라도 미국 국민들의 밥그릇을 챙기겠다는 것이다. 막무가내식의 보호무역주의와 고립주의 색채가 그것을 말해준다. “오늘부터 새로운 비전이 미국을 다스릴 것”이라는 취임사의 내용이 너무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렇다고 트럼프가 지난날 링컨이 추구하던 정치철학을 아예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금 모습은 링컨이 바라보기에도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링컨이 남북전쟁에서 승리하고 노예해방과 미국 통합을 일궈낸 성경의 가르침을 엉뚱한 방향으로 발산하고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트럼프 성경책의 내용이 링컨의 것과 다르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