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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섭 칼럼] 이른바 ‘백두혈통’의 후예들

권력 망명객인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독살당한 사건은 헐리우드 영화 ‘디 인터뷰’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의 이복동생으로서 북한 지도자인 김정은이 미국 정보기관에 의해 암살된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교체되었고, 무대가 평양에서 쿠알라룸푸르로 바뀌었을 뿐이다. 김정은이 암살 지령을 내렸을 것이라는 개연성이 특히 눈길을 끈다.

‘디 인터뷰’가 아니라도 이번 사건은 가히 첩보영화 이상이다. 김정남이 진작부터 신변 위협에 시달렸다는 것부터가 긴장을 자극한다. 그를 쫓는 북한 요원들과 승객으로 붐비는 국제공항, 슬그머니 따라붙은 두 명의 여인, 장난치듯 내뿜은 독약 스프레이…. 각각의 팩트가 극적인 요소를 더해준다. 여기에 북한이 직전에 발사한 탄도미사일과 유엔 규탄 장면까지 곁들인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디 인터뷰’에 대한 북한의 대응이 전방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일이 실제 벌어진 현실에 더욱 전율하게 된다.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노골적 테러행위’라고 반발했는가 하면 백악관에 항의서한까지 보냈다. 더 나아가 ‘9·11 테러’를 거론하며 제작사인 소니 픽처스에게 노골적인 엄포를 놓기도 했다. 결국 영화가 미국의 일부 극장에서 제한적으로 상영되다 슬그머니 막을 내리고 만 배경이다. 불과 2년 전의 얘기다.

문제의 초점은 왜 김정남이 제거돼야 했을까 하는 점이다. 비자금 갈등을 일으켰다는 추측도 있고, 그동안 감춰졌던 김정은의 ‘출생의 비밀’을 퍼뜨리고 다녔기 때문에 보복을 당한 것이라는 분석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김정남이 백두혈통의 장남으로 한때 권력 세습의 후계자로 지목됐다는 점에서 김정은의 심적 부담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김정남이 과거에도 여러 차례나 위기 상황에 처했었다는 사실이다. 이번 말레이시아 방문 때 위조여권을 사용한 데서도 확인되는 점이다. 신분을 감추려는 의도였다. 결국 김정은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기면서 해외로 숨어 떠돌다가 마흔여섯이라는 한창 나이에 비운의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다른 형제들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김정은의 친형인 김정철이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 “제구실도 못하는 나를 품에 안아 보살펴 주는 크나큰 사랑에 보답하겠다”고 충성 서약을 해야 했을까. 고모인 김경희도 ‘정치적 식물인간’이 된 지 오래며, 숙부인 김평일 체코주재 대사도 교체설이 이어지는 중이다. 여동생인 김여정만이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임명돼 활동 보폭을 넓혀가고 있을 뿐이다.

하긴, 김정은이 고모부인 장성택을 비롯해 현영철, 김용진 등 그동안 처형·숙청한 주변 인물들이 100여명에 이른다는 점에서 누구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김정남이 생전에 구명 편지를 보내면서 첫머리에 ‘존경하는 세자 저하 전상서’라고 썼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제 김정남이 제거된 상황에서 마카오에 기거하는 한솔·솔희 남매의 신변에 관심이 쏠린다. 더욱이 김한솔은 백두혈통의 장손이기 때문에 ‘젊은 독재자’로서는 경계 대상일 수밖에 없다.

김일성·김정일에 이어지는 북한 ‘3대 세습’ 체제의 비극적인 모습을 바라보며 걱정을 감출 수 없는 것은 북한이 우리와 민족 공동체라는 운명을 나눠갖고 있는 까닭이다. 영화나 소설의 한 장면이 아니라 우리가 맞닥뜨린 엄연한 현실이라는 얘기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김정은이 언제, 어떻게 도발을 감행해올 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계속되는 경제난과 체제유지 부담에 따른 정신적 압박이 한도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이미 미사일도 손에 쥔 국면이다. 그가 스위스 치즈를 안주로 삼아 포도주를 들면서 김정남 암살 성공 보고에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 모습을 떠올리는 자체가 별로 유쾌하지 않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