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카페, 같은 여인…붓은 다르다 말하네[이윤희의 아트in스페이스]<9>

▲고흐·고갱의 '카페' 들여다보기
소도시 아를 사랑한 고흐 '밤 카페' 풍경에 연민 담아
아를이 못마땅했던 고갱, 고흐 지인·카페 퇴폐적 묘사
같은 공간 같은 인물일진대 화가에 따라 이토록 갈려
  • 등록 2021-11-06 오전 12:01:01

    수정 2021-11-06 오전 12:01:01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 그린 ‘밤의 카페’. 파리에서 아를로 이주한 반 고흐가 그 유명한 노란집에 들어가기 전 잠시 머물던 ‘카페 드 라 가르’의 풍경을 그렸다. 사흘밤을 자지도 않고 그렸다는 밤 카페 풍경, 특히 빨강·노랑·초록의 강한 대비에 “밝은 아를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과로 때문에 점점 과민해가는 반 고흐의 육체적·정신적 상태를 표현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즈음 반 고흐는 “간혹 낮보다는 밤이 더 생동감이 있어 색채가 넘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고도, “카페는 스스로를 망쳐버리거나 미치거나 범죄를 저지르기에 걸맞은 장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캔버스에 유채, 72.4×91.1㎝, 미국 뉴헤이븐 예일대갤러리 소장.


200여년 전 소설 ‘오만과 편견’이 탄생한 곳은 낡은 책상이었답니다. 종이 몇 장과 잉크병, 깃대펜이 전부인 그곳이 바로 영국작가 제인 오스틴의 작업실이었던 셈입니다. 장서가 그림처럼 꽂힌 책장, 큼직한 책상이 근사한 ‘서재’란 공간은 남성 작가만 차지할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재뿐인가요. 화가의 공간이던 ‘아뜰리에’도 그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카페’와 ‘술집’ ‘광장’도, 한 가정집의 ‘부엌’과 ‘식당’ ‘침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해 있던 공간이지만, 그곳이 모든 이들에게 늘 공평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오랜 시간 미술관을 일터로 삼아온 이윤희 학예연구관이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론 객관적 기록으로, 때론 상징을 담아, 때론 비틀린 풍자를 숨겨낸 ‘그림으로 읽는 공간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사람이야기’입니다. 주말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일 없이도 혹은 일을 가지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집 밖의 장소는 ‘카페’다. 음악이나 옆 테이블의 소음을 배경으로 해서 홀로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하거나 지인을 만나 잡담을 나누는 풍경은 이제 일상이다. 달랑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낮부터 저녁까지 앉아 있는 손님을 보면 주인은 속이 터지겠지만, 사실 이러한 패턴은 요즘 생긴 게 아니라 19세기에도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카페의 천국인 프랑스에선 당시, 문인이나 화가, 사상가들이 카페에 모여 토론을 하고 동지를 만들고 생각을 나누는 일이 다반사였다. 화가들은 비좁은 작업실에서 벗어나 카페의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렸고, 사상가들은 신문을 돌려 읽으며 세태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얻었으며, 문인들은 다른 작가의 작품에 대한 찬탄이나 신랄한 비평을 했던 장소가 카페였던 것이다.

그때의 카페가 오늘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서민이 갈 수 있는 저렴한 카페에는 당구나 체스 등 오락거리가 마련돼 있고 부르주아가 가는 카페에는 음악이나 무용 등 고급문화를 즐길 무대가 있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 시절에도 커피와 음료가 주류였지만 저녁에는 술도 팔았고 심지어 밤새워 영업도 했다니, 요즘 카페보다 폭넓은 활동이 가능했던 셈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주로 모였던 곳은 그 유명한 ‘카페 게르부아’ ‘라 누벨 아테네’ 등이었다. 파리의 카페 게르부아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존경했던 마네의 집 근처였고, 바로 그곳에서 서로 동지가 돼 첫 전시를 하기로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그곳에 가면 항상 누군가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전시를 도모할 때는 한 주에 한번 무슨 요일에 다같이 만나기로 일시를 정하기도 했다. 마네는 말이 많고, 드가는 자주 화를 냈으며, 피사로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고 하니, 시간을 거꾸로 돌려 그 시절 카페 게르부아에 가서 그들의 토론을 엿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싶다.

물론 카페는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전역에 퍼져 있었고, 작은 도시에도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카페가 있었다. 덕분에 풍속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남긴 다양한 카페 그림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카페를 고르라면 단연 이곳,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와 폴 고갱(1848∼1903)이 한때 같이 작업을 했던 프랑스 남부 아를의 ‘카페 드 라 가르’를 빼놓을 수 없다.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꿈꾼 고흐

네덜란드 사람이던 반 고흐는 당시 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로 가서 인상주의를 접하고 화풍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 네덜란드 시절과는 달리 원색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인상주의자들보다 길게 뻗어나가는 붓터치로 자신만의 독자성을 구축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파리의 화가들과 평범한 교우관계를 유지하기에는 지나치게 열정적이고, 그림이 팔리지 않아 가난했으며, 대도시 생활에서 오는 우울감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반 고흐는 파리를 떠나 햇살이 가득한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아를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동생에게 자금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늘 궁핍했던 반 고흐는 아를의 작은 집에 세를 얻어 그곳을 노란색으로 칠하고 활기찬 삶을 꿈꾸었다.

폴 고갱의 ‘밤의 카페, 아를’(1888). 빈센트 반 고흐의 초청으로 아를로 온 고갱이 그린 ‘카페 드 라 가르’의 풍경. ‘같은 공간 다른 표현’ 덕분에 반 고흐가 그린 ‘밤의 카페’와 자주 비교되는 작품이다. 손님이 빠져나간 공간을 퀭한 시선으로 그려낸 반 고흐에 비해, 차라리 북적이는 인물들로 꽉 채운 고갱의 그림이 ‘현실적’이란 평도 있다. 캔버스에 유채, 73×92㎝, 러시아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 소장.


이 시기에 그는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싶은 꿈을 꾸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자의식이 강한 예술가들이 어울려 무슨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가 공동체를 꿈꾸며 열정적으로 초대했던 인물이 다른 이도 아니고 고갱이란 점에서, 이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우울하지 않을 수 없다. 고갱은 반 고흐와 전혀 다른 기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화상이던 동생으로 하여금 고갱의 빚까지 탕감해주며 초대를 했지만, 고갱은 오자마자 좁아터진 숙소에 실망을 드러냈고 반 고흐의 열렬한 환영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곳 시골마을의 사람들과 반 고흐는 진심을 담아 친근하게 지냈지만, 고갱은 오자마자 그곳을 뜨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거다.

이 시절 반 고흐가 그린 ‘밤의 카페’(1888)는 고갱이 도착하기 한 달 전쯤 동네의 카페를 사흘 밤낮으로 그려 완성한 작품이다. 그림 속 저 멀리에 있는 시계를 보면 시간은 밤 12시 15분쯤이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남아있는 이들은 누구며, 특히 흰옷을 입고 서 있는 남자는 누구일까. 당구대 옆에 선 흰옷의 남자는 카페주인 ‘지누’다. 주인 외에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모두 다섯 명. 그중 문 옆에 있는 두 인물 가운데 한 명은 여성이다. 이 여성은 밤늦게까지 카페에 머물며 호객을 하는 매춘부로 해석된다. 테이블에는 치우지 않은 술잔이 가득하고, 전면 의자들은 마구 흐트러져 있으며, 앉아 있는 사람들은 술에 취했거나 졸리거나 침울해 보인다.

배경은 또 어떤가. 붉은 벽면에 켜져 있는 등불은 당구대에 진한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환하게 켜져 있지만, 노란색과 녹색이 어우러져 퍼져나가는 빛의 곡선들은 어쩐지 속이 울렁거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붉은 벽과 노란 바닥, 녹색 천정은 강한 보색대비를 이루지만 강렬하고 화려하기보다는 암울한 느낌을 배가시킨다. 반 고흐가 그린 이 밤의 카페 풍경은 한밤중 갈 곳 없이 떠도는 사람들의 외로움, 적막감에 더해 그들에 대한 반 고흐의 연민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이다.

지누 부인을 대하는 두 화가의 시선

하지만 한 달 후 아를에 도착한 고갱이 그린 카페 드 라 가르는 조금 달리 보인다. 물론 술에 취해 테이블에 엎드린 사람도 있지만 고갱은 기본적으로 활기를 띠는 곳으로 ‘밤의 카페, 아를’(1888)을 그렸다. 멀리 한 테이블에서 세 명의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수염 기른 남자는, 아를 시절 반 고흐의 절친한 친구 우체부 조셉 룰랭이다. 반 고흐는 룰랭의 단독 초상화를 여섯 점이나 그렸고, 그의 부인을 비롯한 가족을 수없이 그렸다. 룰랭의 친절함과 따스함에 큰 용기를 얻었고 그의 지혜에 늘 감동했으며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갱은 반 고흐의 절친 룰랭을 밤늦은 시간 매춘부들과 수다나 떠는 인물로 그려놨던 것이다. 고갱이 파놓은 함정은 이뿐만이 아니다. 화면 앞쪽에 턱을 괸 채 그림을 그리는 고갱을 바라보며 묘한 눈웃음을 짓는 이 여인은 카페 주인 지누의 부인이다. 부인의 앞에는 술병과 잔, 안주 접시가 놓여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여인, 지누 부인의 초상’(1888∼1889). 반 고흐가 머물던 카페의 주인 지누의 부인을 그린 작품. 반 고흐 특유의 신비로움을 띤 인물화 중 한 점으로, 배경이 된 노란색은 지누 부인의 모습을 부각하려는 의도적인 선택으로 해석한다. 반 고흐는 이외에도 지누 부인을 모델로 한 그림 5점을 더 그렸다. 캔버스에 유채, 91.4×73.7㎝,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그런데 이 그림의 모델인 지누 부인은 사실 고갱이 반 고흐와 작업실에서 함께 그린 것이다. 같은 공간 속 같은 인물을 그린 뒤 고갱은 그 배경을 카페로 변형시켰는데, 부인이 실제 앞에 뒀던 것은 술병이 아니라 책이었다. 실제로 반 고흐의 ‘아를의 여인, 지누 부인의 초상’(1888∼1889)에서 부인은 책을 읽고 있다. 이처럼 한 인물이지만 분위기가 전혀 다른 것은 두 화가의 개성이기도 하지만 관점의 차이기도 하다. 고갱은 아를을 빨리 탈출하고 싶었고, 아를의 사람이라면 반 고흐의 친구든, 친구의 부인이든 존중이나 애정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카페 그림은 같은 장소를 그려도 화가의 시선에 따라 얼마나 달리 나오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론 누구의 그림이 더 좋은가는 취향의 차이겠으며, 여기서는 별개의 문제다. 다만 19세기 후반 반 고흐와 고갱이 아를의 허름한 카페에서 느끼고 본 것의 차이는, 같은 공간 같은 인물은 물론 비슷한 색이라도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윤희 학예연구관은…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지금은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으로 일한다. 일터에 나가면 미술작품들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전시기획을 하고, 글을 쓴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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