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지칠 수 없다. 나는 대한민국 산불진화헬기 조종사다"

[제2의 강원산불은 없다]①산불진화헬기 기장 출동 24시
1971년 창설 이래 산불과 싸우고 있는 231명의 영웅들
인력과 장비 부족 등으로 악전고투…지원책 마련 시급
  • 등록 2019-05-08 오전 6:19:00

    수정 2019-05-08 오전 7:13:38

산림항공본부 소속 KA-32가 산불을 진화하고 있다. 사진=산림청 제공


[원주(강원도)= 이데일리 박진환 기자] 오전 4시 힘겹게 눈을 떴다. 연초부터 계속된 출동과 대기로 몸은 이미 천근만근이다. 전날에도 늦게까지 이어진 산불진화와 장비점검으로 오후 11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돌아올 수 있었다. 잠깐 눈을 붙이려는 순간 우리 부대측 DMZ(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산불을 먼저 꺼달라는 민원성 전화가 계속되면서 잠을 설쳤다. 조금 더 쉬고 싶지만 이제 나가야 한다.

오전 4시50분 군 비행장에 임시 계류 중인 헬기 앞에 섰다. 오늘은 다행히 강풍이 멈출 것이라는 예보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행계획서를 제출한 뒤 기체 점검에 나섰다. 대형헬기로 분류되는 러시아산 KA-32(카모프, 담수량 3000ℓ)는 강풍 등과 같은 기상 악화에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임무수행이 가능하다. 문제는 이 때문에 다른 기종에 비해 출동이 잦다는 것. 오늘 비행은 강원도 고성 DMZ 일원으로 유엔사의 사전 비행승인을 받아야 하는 지역이다. 일출이 점점 다가오면서 정비사들의 손길도 바빠지기 시작한다. 기체 상태를 100%로 맞추기 위해 여러 꼼꼼한 점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전 5시34분 일출과 함께 헬기는 이륙하기 시작한다. 해가 뜨기전부터 일출후 1시간에는 기류 변화가 거의 없어 산불 진화에 최적화된 유일한 시간이다. 이 때 진화를 마무리하지 못하면 하루가 너무 힘들어진다. 10분 뒤 가까운 강에서 물을 담고 산불현장에 도착하니 밤새 이어진 산불이 긴 띠를 이루고 있다. 저공비행으로 3000ℓ에 달하는 물을 뿜었다. 다시 물을 담기 위해 이동한다. 물을 담고 또 화마에 싸운다. 5~10분 간격으로 담수와 살수가 계속됐다. 불길과 함께 진화가 되면서 하얀 연기가 현장을 덮쳤고 시야 확보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웠다.

오전 8시, 2시간 30분 정도의 1차 진화작업이 마무리됐다. 이제 급유를 위해 중간 기지로 이동한다. 비행장과 현장 사이에 마련된 이동 기지에는 정비사와 급유차가 이미 와 있다. 급유와 동시에 기체 점검이 바쁘게 진행됐다.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지만 언감생심이다. 전날 항공본부에서 챙겨준 쵸코바와 두유가 유일한 식사거리다.

오전 8시30분 다시 출동이다. 바람이 강해진다. 헬기를 이용한 산불 진화는 바람과의 싸움이다. 지난달 강원과 고성과 강릉, 인제에서 발생한 강원산불 당시에도 최대순간풍속 131㎞/h의 양간지풍이 불면서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나마 이동 중에는 바람을 영향을 덜 받지만 속도를 줄여야 하는 살수와 속도가 0이 되는 담수 시에는 추락 공포가 항상 엄습한다. 특히 3000ℓ의 물을 담는 담수 시에는 헬기에서 나오는 바람과 함께 계곡에서 부는 강한 바람이 맞물리면서 기체가 요동친다. 거친 물보라는 정면을 덮쳐 앞을 전혀 볼 수 없어 오로지 감각에 의존해야 한다.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기체는 물에 닿고 최악의 순간이 올 수 있다. 작년과 2017년에도 이 과정에서 사고가 있었고 탑승 중이던 동료 정비사 2명이 사망했다.

오후 2시 오전부터 이어진 작업이 벌써 50회를 넘어섰다. 배고픔과 피로감이 몰려오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 큰 불길을 모두 잡지 못하면 이 불이 군 시설과 민가를 덮친다. 이 일대는 온통 지뢰밭에 산세가 험해 지상인력이 투입할 수 없는 지역으로 헬기가 아니면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체력에 한계를 느끼지만 절대 지칠 수 없는 이유다. 오후 4시 물을 다시 담고 현장으로 가던 중 강풍을 만났다. 2200마력에 달하는 엔진 2기가 최대 출력을 내지만 3000ℓ에 달하는 물 때문에 기체가 중심을 잡지 못한다. 이제 결정해야 한다.

오후 6시 강풍을 만나 추락 위기의 상황에서 기체에 있던 물을 버린 후에야 다시 조종이 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잠시 진화작업이 지연됐다. 시간을 벌기 위해 작업 속도를 높여야 했다. 7시30분 점점 해가 진다. 일몰과 동시에 헬기 진화는 끝내야 하지만 오늘은 예외다. 내일은 다른 현장에 출동해야 하기 때문에 이 현장은 오늘 무조건 끝내야 한다. 이제 몸은 한계가 왔고 오로지 정신력으로 버틸 수 밖에 없다. 오후 8시 마침내 불길을 모두 잡았다. 이제 기지로 돌아간다.

오후 8시30분 기지에 돌아왔다. 아까 흔들렸던 현상에 대해 정비사에 얘기했고 같이 기체 점검을 통해 이상유무를 체크했다. 오후 9시 비행일지를 작성한 뒤 숙소로 돌아가는 차량에 탔다. 오후 10시 오늘 첫 끼니를 해결했다. 계속된 긴장으로 배고픔은 거의 없지만 내일을 버티기 위해 오늘 먹어야 한다. 오후 11시 잠자리에 들기 전 가족들과 잠시 영상통화를 했다. 가족들이 보고 싶지만 5월이 끝나기 전에는 얼굴을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이제 잠시 눈을 붙여야 한다.

나는 산림청 산림항공본부 소속 김승룡 기장이다.

산림항공본부 소속 김승룡 기장이 산불진화헬기를 조종하고 있다.


강원산불의 숨은 231명의 영웅들

산불진화헬기는 산이 많은 국내에서 산불을 잡는 가장 효율적 수단이다. 2000~8000ℓ의 물과 소방용 약품을 싣은 헬기가 융단폭격 식으로 쏟아부으면 왠만한 산불은 금새 잡힌다. 지상인력 수백명이 해도 힘든 작업이다. 특히 강원과 경북 등 산세가 험한 지형에서는 지상을 통한 인력과 장비 이동이 어려워 헬기가 유일한 산불진화 장비로 손꼽힌다.

이에 산림청은 1971년 4월 산림청 항공대를 창설했다. 2006년에는 산림항공관리본부로 명칭을 바꿨고 강원 원주로 본부를 이전했다. 전국 어디서나 30분 이내 출동이 가능한 47대의 헬기를 지역별로 12개 권역에 분산 배치했다. 현재 산림항공본부에는 헬기 조종사 92명과 정비사 73명 등의 전문임기제 공무원들과 66명 규모의 공중진화대가 운용 중이다. 지난달 강원도 동해안 일원을 덮친 강원산불 현장에서도 이들은 사흘간 화마와 싸웠고 결국 이겼다.

강원산불과 같은 국가적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조종사들과 운항정비팀은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특히 건조한 날씨에 강한 바람, 입산자들이 몰리는 매년 봄과 가을에는 24시간 대기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종사들과 정비사, 공중진화대 대원들은 개인은 물론 가정을 포기해야 한다. 특히 조종사들은 항공안전법상 1일 최대 8시간 이내로 비행시간을 제한하지만 대형산불과 같은 상황은 국가재난으로 분류돼 적용받지 않는다. 헬기 1대당 2인이 탑승하는 것을 고려하면 47대의 헬기를 유지하기 위해 모두 94명이 필요하고 예비인력까지 고려하면 120여명이 필요하지만 현재 조종사는 92명에 불과하다.

산림항공본부 소속 김승룡(49) 기장은 “산불 진화는 매번 죽음의 고비를 넘곤 한다. 강풍과 함께 각종 고압선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덮칠 지 몰라 힘든 상황의 연속”이라며 “바람에 약한 중·소형 헬기는 도태시키고 장기적으로 대형·초대형 헬기 중심으로 전환해야 하며 인력난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지적했다.

강원 원주의 산림항공본부에서 만난 운항정비팀 김주훈(52) 검사관도 “인원이 좀 더 보충돼야 좀 더 정밀하게 헬기를 정비할 수 있고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할 수 있다”며 “현재 산림청에서 운영 중인 헬기는 모두 6가지 기종으로 제작한 나라와 연식이 모두 달라 정비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토로했다.

산림항공본부 운항정비팀 소속 검사관들이 헬기를 정비하고 있다. 사진=박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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