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칼럼] "1억쯤 깎아주면 살래요?"

  • 등록 2017-11-20 오전 12:12:00

    수정 2017-11-20 오전 8:12:22

[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길이 66㎝ 아담한 프레임. 그 안에 곱슬곱슬한 머리를 늘어뜨리고 우는지 웃는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남자. 서양미술사에서 봐왔던 그가 맞다. 예수 그리스도 형상. 그런 그가 어느 날 ‘모나리자’와 족보를 같이한다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자 세계미술계는 발칵 뒤집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00년경 그렸다는 ‘살바토르 문디’다. 우리말로 풀면 ‘구세주’ 정도 되지만 흥분한 이들은 ‘남성 모나리자’라며 치켜세웠다. 500여년 설움을 한 번에 날린 대사건. 2011년 일이다.

하지만 그조차 예고편이었다. 결국 6년 만인 지난주 ‘살바토르 문디’는 초대형사고를 쳤다. 뉴욕크리스티경매에 출품해 4억5030만달러(약 5000억원)에 팔리며 미술품경매사를 다시 쓴 것이다. 이제껏 최고가는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이 세운 1억7940만달러(약 2000억원)니 그 파장이 어떨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림 자체로만 보면 참 드라마틱한 생애다. 프랑스·영국 왕가를 전전하며 중세를 보낸 그림은 1900년대 영국의 한 개인수집가에게 넘어가며 행방을 감췄다. 다시 출현한 건 1958년 소더비경매. 하지만 당시 화폐가치를 감안하더라도 단돈 45파운드(약 7만원)에 팔리며 스타일을 완전히 구겼다. 다들 ‘가짜’려니 해둔 거다. 반세기 뒤인 2005년 재등장한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짝퉁’ 취급을 받으며 1만달러(약 1000만원)도 안 되는 초라한 몸값을 받았다. 그러다가 운명은 2011년에 갈렸다. 런던내셔널갤러리 전시에 나서며 ‘그간 몰라봐서 미안한’ 진품으로 판정받은 거다.

예술품 가치가 시장가격에 따라 ‘확정’되는 건 새삼스럽지 않다. 게다가 아트테크로 분류되면 ‘돈 자랑’한 사람은 고급스러운 안목까지 평가받는다. ‘살바토르 문디’만 해도 그렇다. AS모나코의 구단주인 드미트리 리볼로프레프가 2013년 그림을 샀을 때의 가치는 1억2750만달러(약 1422억원). 이번 낙찰로 그는 수수료·세금 뗄 거 다 떼고도 족히 3억달러(약 3300억원) 이상은 챙기는 게 됐으니 이보다 화끈한 투자 안목은 없다.

그렇다고 모두가 배 아픈 이 상황에 끼얹은 찬물이 없는 것도 아니다. “먹고사는 일에 1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냉소. 쿨한 척이 아니라 정말 관심이 없는 거다. 이런 면에서 예술은 상대적이다. 내가 인정하면 5000억원도 던지지만 내 관심을 못 끌면 500원도 아까운 법. 물론 예술 자체가 먹고사는 일의 전부인 이들도 있다. 최근 한 전시장서 만난 원로작가는 “내 일생을 다 바친 수고를 생각하면 그림값은 당연히 비싸야 한다”고 했다. 돈으로 따질 일이냐는 말을 에두른 거다.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도 올해 마무리에 접어든다. 대표 경매사인 서울옥션과·케이옥션은 홍콩·서울 등서 여는 한두 차례의 메이저경매만을 남겨두고 있다. 남은 경매에서 뒤집히는 일이 없다면 올해 최고성적은 지난 4월 김환기의 푸른 전면점화 ‘고요’가 낸 65억5000만원이 될 거다. 76배가 넘는 5000억원짜리가 거래되는 해외시장이 부러워서 꺼낸 소리겠나. 결산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점점 더 자극적인 가격경쟁터가 돼가는 미술시장이 걸려 하는 소리다. 가격표를 먼저 보는 그림이라니.

동화 ‘플랜더스의 개’(1872)의 마지막 장면, 넬로가 숨을 거두기 전 봤다는 루벤스의 그림 두 점이 자꾸 생각나는 까닭이다. 정확히 말하면 루벤스의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보던 주인공의 마음이다. 예술의 본령이 그거니까. “1억쯤 깎아주면 살래요?” 세상에는 이 질문에 답을 못하거나 하기 싫은 사람이 훨씬 더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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