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호의 그림&스토리]<23>잊혔지만 잊지 못할 춤사위

▲배운성 '최승희' & 변월룡 '공훈무용가 최승희'
피카소 극찬 조선 무희 '최승희' 월북 가린 삶
천재적 몸짓 화폭에 담은 또 다른 천재화가들
유럽 유학 1호 '배운성' 고려인 화가 '변월룡'
잊힘 강요 당했으나 잊어선 안될 예술 거장들
  • 등록 2021-07-16 오전 3:30:01

    수정 2021-07-16 오전 5:26:48

배운성이 1955년 목판화로 제작한 ‘장구춤’. 어느 미술애호가가 1996년 배운성의 유족에게서 입수해 보관했다고 알려져 있다. 풍년을 기원하고 추수를 감사하는 민속놀이에 등장하는 전통춤을 현대무용으로 재창작한 최승희의 뛰어난 춤사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1939년 촬영한 사진(작자미상)을 바탕으로 삼았다. 다색목판, 30×20㎝, 개인소장.


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1936년 10월 서울 종로 명월관. 민족지도자들이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 선수를 축하하는 모임을 열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해외공연을 마치고 잠시 경성에 돌아온 최승희(1911∼1967)도 함께했는데 이날 여운형은 손기정과 최승희를 나란히 앉혀놓고 “자네들이야말로 조선을 빛내고 있는 애국자일세”라고 격려했습니다. 최승희가 누구던가요. 70~80여년 전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서 인정받은 전설의 무용가입니다.

서울 양반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최승희는 숙명여고를 다니던 1926년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서울 공연을 보고 감동 받아 그이를 따라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릅니다. 이후 각고의 노력으로 실력을 쌓은 후 일본 무용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됐습니다. 명성이 점차 높아지자 일본을 넘어 뉴욕 브로드웨이를 비롯해 파리·런던·베를린·브뤼셀·로마·헤이그 등에서 순회공연을 열었고 공연마다 동양의 전통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안무로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런 해외활동으로 외국에는 최승희의 공연 영상과 사진 등이 많이 남아 있는데, 아쉽게도 그림은 많지 않습니다.

전통춤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극찬 받은 최승희

파블로 피카소가 파리 공연에서 최승희의 춤에 감동을 받아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지만 아쉽게도 행방은 알 수 없습니다. 일본 화가들의 작품이 몇 점 있으나 최승희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우리나라 화가만이 최승희의 몸짓을 제대로 이해하고 중요한 자세를 포착해 몇 점 남겼는데, 화가 배운성(1901∼1978)의 ‘장구춤’(1955)이 그런 작품입니다.

다색목판화로 제작한 ‘장구춤’은 주황색의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최승희를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작품입니다. 장구를 오른쪽 어깨에 비스듬히 매단 최승희가 빨강저고리와 검정치마를 입은 채 오른손으로 채를 쥐고 강약과 장단을 맞추고 있습니다. 머리 위로 손을 올린 채 검지손가락을 편 왼손은 몸의 율동을 손끝까지 전달시키고 있습니다. 손과 반대로 발은 오른발을 앞으로 내민 채 살짝 들어 하얀 버선끝이 보입니다. 왼손 검지와 오른쪽 발끝이 이렇게 서로 상응하며 조화롭게 움직이니 이것이 한국 춤의 멋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승희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조선 춤의 일인자인 한성준(1874∼1942)을 찾아가 전통 악기와 가락, 춤을 공부합니다. 이를 통해 최승희는 일본색 지우기에 돌입합니다. 장구춤, 승무, 칼춤, 부채춤 등 전통춤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배운 현대무용을 접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춤을 개척했습니다. 세계 순회공연을 할 때의 구성도 ‘신라궁녀’ ‘낙랑의 벽화’ ‘고구려의 전무’ 등 조선의 역사와 긍지를 알리는 내용으로 짜, 일본 경시청에서 3분의 1은 무조건 일본 소재로 하라는 압력을 받기도 했습니다.

‘장구춤’을 추는 최승희를 촬영한 사진(1939). 한국 다큐멘터리 거장으로 불리는 정수웅(1943∼2020)이 다큐멘터리 ‘세계의 무희 최승희’(2002)를 제작하면서 수집한 최승희 관련 자료를 한 데 묶은 저서 ‘최승희’(2011)에 실려 있다. 배운성의 ‘장구춤’에 모티프가 된 사진이다.


해방 후 이데올로기로 남북이 갈라서자 최승희도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춤과 예술을 생각하면 남한을 선택하고 싶었으나 남편 안막(1910∼1959)의 요청도 거절하기 어려워 고민이 깊었습니다. 남편은 나중에 북한 문화부 부부장까지 역임할 정도로 북쪽에서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 잠시 남편을 만나러 간 북한에서 직접 면담한 김일성이 대동강변에 최승희무용연구소 부지까지 마련하자 어쩔 수 없이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는 북한을 선택합니다. 그 뒤 무용연구소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대규모 예술단을 꾸려 소련·중국으로 공연을 다니며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그 제자들은 나중에 소련·중국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성장합니다.

유럽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화가 배운성

배운성은 독학으로 독일 미술대학을 졸업한 최초의 유럽 유학생입니다. 18년 동안 유럽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며, 한국화가로 국제미술전에서 가장 많이 수상한 뛰어난 화가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2차대전으로 프랑스 파리가 위험하자 많은 작품을 그대로 둔 채 황급히 귀국했습니다. 고국에서 국전 심사위원, 홍대 미대 학부장으로 활동을 했는데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사회주의자인 부인을 따라 월북합니다. 최승희와는 월북 전부터 가까운 사이였으며 최승희 가족과 같은 평양 예술인아파트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장구춤’은 1939년 촬영한 사진의 명암·동작 등이 동일해 사진을 보고 제작한 판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최승희를 모델로 한 또 다른 작품으로는 화가 변월룡(1916∼1990)의 ‘공훈무용가 최승희’(1954)가 있습니다. 부채춤을 추고 있는 최승희를 둘러싼 색채는 온통 붉은색입니다. 커튼과 치미·부채까지 붉습니다. 양손에 부채를 쥔 채, 오른손은 내리면서 뒤로 젖히고 왼손은 위로 올렸으며 오른발을 살짝 치켜들어 고무신 끝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묘하게 ‘장구춤’의 자세와 흡사합니다. 쪽진 머리에 비녀와 꽃모양 머리장식을 달았는데 거기서 빠진 구슬이 귀 뒤로 내려와 있습니다. 압권은 표정입니다. 부채를 활짝 펼친 채 미소를 띠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얼굴의 음영 묘사가 뛰어나고 부채를 쥔 손부터 고무신 바닥까지 조명을 받는 무희를 표현하는 데 어느 한 곳도 소홀함이 없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변월룡이 1954년 그린 ‘공훈무용가 최승희’. 러시아 고려인 천재화가인 변월룡은 특히 인물화에 뛰어났는데,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정치인 블라디미르 레닌, 문학가 이기영 등 유명인사부터 공산청년동맹원, 잡역부까지 다앙했다. 실물에 가장 근접했다고 평가받는 이 유화 외에 최승희를 그린 스케치작품도 두 점 전한다. 캔버스에 유채, 118×84㎝, 유족소장.


변월룡은 우리가 잃어버린 한국 서양화의 거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월룡의 조부모와 부모는 일제를 피해 연해주로 이주했고, 그 자신은 1916년 연해주에서 태어난 러시아 한인 2세였습니다. 최고의 미술교육기관인 레닌그라드예술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실력을 인정받아 교수로 활약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7월, 전쟁으로 붕괴한 북한미술계를 재건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지도하라는 당시 소련정부의 명령으로 북한에 들어와 평양미술대 학장이자 고문으로 1년 3개월여간 활동합니다.

죽기 전까지 자신의 뿌리를 그리워한 변월룡

짧은 기간에도 북한미술계에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무엇보다도 뛰어난 실력으로 북한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과 기법을 전해줬습니다. 특유의 겸손함과 친화력으로 많은 예술가와 친교도 쌓았습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인물에게는 초상화를 그려 선물로 주곤 했는데, ‘김용준 초상’ ‘이기영 초상’ 등이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공훈무용가 최승희’도 그때 탄생한 작품입니다. 변월룡은 북한에서 만난 최승희가 아주 인상적이었는지 이 그림 외에 2점의 스케치작품도 그렸습니다.

북한 체류 중 소련에 잠시 다녀오려는 그에게 북한은 영구 귀국을 제안했으나 가족을 비롯해 모든 기반이 소련에 있던 그로서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거절이 당국에는 괘씸죄로 걸려 북한에서의 활동은 전부 삭제되고 다시는 북한 땅을 밟지 못하게 됩니다. 소련으로 돌아온 변월룡은 평생 레핀예술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명작을 남겼고 1990년 7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습니다. 죽기 전까지 자신의 뿌리인 고향과 북에서 맺은 인연을 그리워했고요.

그렇다면 최승희의 최후는 어땠을까요. 1955년 인민배우, 1957년 제1급 국가훈장을 받고 북한인민회의 대의원까지 지냈지만 1958년 남편 안막이 종파투쟁으로 숙청되면서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1959년 남편이 사망한 후 1966년까진 조선무용동맹위원장직을 유지했으나 체제 선전에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판단됐는지 1967년 지방으로 쫓겨났고 196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더 이상의 기록이 없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했던 명성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최후입니다.

피카소는 최승희를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예술가는 시대의 꿈과 이상을 창조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조선의 그가 그런 예술가다. 놀랍다.” 하지만 우리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지금껏 최승희의 삶과 춤, 업적을 제대로 알려고도, 알리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같은 이유로 이미 오래전 유럽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배운성, 사실주의 서양미술의 거장 변월룡 등 많은 예술가들을 잊은 채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앞으로 이렇게 잊힌 예술가들의 생애와 작품을 제대로 찾아내고 조명해 우리 예술계의 든든한 원동력으로 이어나가길 기대해봅니다.

※ 최승희무용연구소

1946년 평양 대동강변에 세운 무용인재 양성기관이다. 초기에는 3개월마다 연구생을 모집하다가 이후 한 해에 두 차례, 30명씩 젊은 무용지망생을 받았다. 이사도라 덩컨 류의 모던댄스, 이시이 바쿠 류의 신무용을 비롯해 발레, 조선무용, 남방무용, 중국무용,인도무용 등을 교육했고, 한국전쟁 뒤에는 조선무용과 발레, 작품연습, 피아노 등의 교과목도 편성했다. 1947년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한 뒤 제2기생부터는 3년의 연구과정과 학원형식으로 운영했는데, 독무가로 재능이 있는 원생은 설립자 최승희의 개인지도를 받았다. 최승희는 창작집단과 함께 무용작품의 안무·창작을 맡는 한편, 인재발굴과 무용지도자의 파견에도 힘을 쏟으며 전국적인 무용보급을 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1953년에 국립으로 승격된 후 1956년 국립무용학교로 개칭했고, 10년 뒤 평양예술대학(1965)을 거쳐 평양음악무용대학(1972)에 통합됐다. 이 기관과 별도로 최승희의 무용을 복원·보존하는 작업은 1992년경 평양에 조직된 ‘최승희무용연구회’가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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