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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진도 세월호 침몰사건이 일어난 후 나흘 뒤인 지난 20일. 영국 출신 피아니스트 마이클 호페(70)는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열린 공연 1부가 끝난 뒤 관객의 박수를 사양했다. 대신 관객들에게 흰꽃을 한송이씩 나눠줬다. 그러곤 꽃을 흔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여객선 침몰사건으로 나라 전체가 충격에 빠져 있는데 박수를 받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후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 등의 책으로 알려진 정목 스님이 무대에 올라 추모의 말을 건넸다.
공연을 기획한 김금훈 헉스뮤직 대표는 “호페가 입국 비행기 안에서 사고 소식을 접하고 어떻게 슬픔을 함께 나눠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며 “공연에서도 흥겨운 곡을 빼고 차분한 곡 위주로 연주했다”고 말했다. 호페는 사고소식을 접하고 공연 제목도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 나갈 때’로 바꿨다. 바뀐 제목 분위기에 맞지 않게 사전에 제작된 프로그램북은 모두 폐기했다.
호페는 ‘독도를 위한 기도’라는 곡을 작곡한 친한파 뮤지션 중 한 명. 2000년 KBS드라마 ‘가을동화’에 삽입된 ‘언포게팅 하트’란 곡으로 친숙한 연주자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으로 3월부터 시작된 연극 ‘날 보러와요’(아트센터K 세모극장)는 대사를 바꿨다. ‘너는 남해 푸른 바다 물속에 잠기고 나는 태안의 검은 바다 위에 떠 있다’라는 극 중 김 형사의 대사가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서다. 이에 김광림 작가는 위 내용을 ‘너는 남해 푸른 바닷물을 보며 시를 쓰고 나는 태안의 검은 바다를 보며 진실을 찾는다’로 수정했다. 또 ‘남해금산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란 대사도 뺐다. 배우들은 공연이 끝난 후 관객의 박수소리가 나오면 다시 무대에 서 인사하는 커튼콜 때 묵념을 하며 애도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지난 16일부터 공연이 시작된 연극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게 보내는 구소련 우주비행사의 마지막 메시지’(명동예술극장)는 막이 오르기 전 무대 테이블 위에 안개꽃 한 다발을 올려두는 방식으로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노래와 쇼가 펼쳐져 애도의 순간을 잡기 쉽지 않은 장르가 뮤지컬. 이 가운데 2월부터 공연된 ‘글루미데이’(DCF대명문화공장)는 배우들이 커튼콜 때 모자를 쓰고 나와 고개를 숙여 여객선 침몰의 슬픔을 나눴다.
추모의 곡을 따로 연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립오페라단은 24일 시작한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를 시작하기 전 조곡으로 ‘솔베이지의 노래’를 연주하며 슬픔을 나눴다. 지난 21일 첫 방한한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예술의전당)도 공연 시작 전에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했다. 추모의 뜻을 담아 선택한 곡이다. 잠시 묵념하는 시간도 가졌다.
서울시향은 24일 첼리스트 이상 엔더스와 협연한 현대음악 시리즈 ‘아르스노바’(예술의전당) 공연에서 지휘자 입장 전 무대 스크린에 애도 문구를 띄워 애도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