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인 척' 하는 경제학, 정치적이야

장하준 교수의 경제학 '하는' 법
성장률·실업률 등 경제지표
다듬어진 해석의 결과물
답은 '경제칵테일'
사상·이론에 학파까지 이종교배를
………………………………………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장하준|496쪽|부키
  • 등록 2014-07-24 오전 6:40:00

    수정 2014-07-24 오전 6:40:00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1930년대 어느 날 소비에트연방 국가계획위원회 사무실. 통계실장 채용을 위한 면접시험이 진행 중이다. 첫 후보자에게 면접관의 질문이 떨어졌다. “2 더하기 2는?” 후보는 “5!”라고 대답했다. 답을 들은 면접관이 반응을 보였다. “혁명적 열정은 높이 사지만 이 자리는 셈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오.” 두 번째 후보자의 답은 “3”이었다. 부드럽던 면접관의 표정이 바뀐다. “이런! 혁명적 성과를 그렇게 깎아내리다니.” 세 번째 후보자는 자신감을 얻었다. “당연히 4”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장황한 연설. 형식논리에 집착하는 부르주아적 과학의 한계에 관한 것이었다. 통계실장의 자리는 결국 네 번째 후보자에게 돌아갔다. 답이 뭐였을까. “몇이길 원하십니까.”

이것이 경제학이다. 생산량이나 소비량, 고용률이나 실업률 같은 경제지표가 조작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제는 해석이다. 선호다. 이데올로기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간파하나.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가 그 답을 내놨다. 그러니까 ‘지금 경제학을 배워야 한다’로. “경제학자에게만 맡겨두기에 경제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책은 그 ‘배워야 하는 경제학’을 적지 않은 양으로 그러나 어렵지 않게 풀어낸 ‘교과서’다.

장 교수의 전작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과는 사뭇 다른 강도다. 획일적으로 강요된 신자유주의의 허점을 파헤치느라 잔뜩 높여놨던 언성은 톤을 낮췄다. 바로 옆사람에게 이르는 듯한 어투로 조목조목 경제학의 안팎을 더듬는다. 그럼에도 빳빳하게 풀 먹인 심지는 꽂아 놨다. 경제학자들에게 ‘사용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지난 30년만 보자. 경제학의 진리로 군림하면서 정작 금융위기 땐 아무 해결책도 못 낸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왜 아직 떠받들어야 하나. 그러니 시장만능에 목매던 그들의 경제학을 이젠 생산과 경제활동의 주역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말이다.

▲경제학자에게 ‘사용 당하지’ 않으려면

경제학이 숫자를 다루는 학문인가. 맞다. 하지만 ‘뻔한’ 숫자라는 게 문제다. 장 교수가 던진 ‘경계 대상’의 정중앙엔 그 숫자가 있다. 경제학에 쓰이는 숫자가 절대 객관적일 수 없다는 거다. 세계 생산량은 몇 나라에서 나온 게 전부고, 소득통계라는 것이 어디 생활수준을 제대로 반영하더냐고 했다. 결정적으로 인간의 삶은 결코 금전적 소득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을 모두 측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측정할 수 있는 것이 모두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경제학이 숫자를 사용해선 안 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성장률·실업률·불평등지수 등이 품고 있는 가치는 인정해야 한다. 다만 이들 숫자가 말해주는 한계까지 봐야 하는 게 대중이 갖춰야 할 덕목이란 거다. 흔히 거론되는 행복지수도 마찬가지. 행복을 측정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의문이지만 굳이 행복을 측정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따진다.

▲“경제학은 정치학이다”

숫자가 걸리는 까닭은 더 있다. 선택되는 과정 말이다. 숫자는 경제라도 선택은 정치란 뜻이다. 장 교수는 정치적·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서 얻을 수 있는 경제학의 객관적 진실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런 뜻에서 “경제학은 정치학이다.” 경제학적 논쟁에는 단 하나의 질문만 유효하다고 했다. “누가 이득을 보는가.” 정부의 역할이 늘 경제의 핵심쟁점이 되는 현상을 들여다보면 판단이 쉽단다. 그러니 경제학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지적 으름장’에 겁먹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과학인가. 이것도 아니다. 예전에도 앞으로도 경제학은 과학이 될 수 없다. 어째서? 이미 많은 오류가 경제학을 마치 물리법칙처럼 다루려던 신고전학파의 ‘과학인 척’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장 교수 전작들의 핵심인, 신자유주의를 부추긴 신고전학파의 사고구조에 대해 들이댄 칼은 여전히 날이 서 있다. 이 논지대로 ‘빈곤과 불평등까지 인간이 제어할 수 있다’는 주장도 이어갔다. 문제는 정책이라고 했다. 요란하게 세계의 소득을 재분배하려 들지 않아도 된다. 극도의 빈곤국을 제외한다면 모든 국가는 자체적으로 절대 빈곤을 없애기에 충분한 양을 생산하고 있으니.

▲‘경제칵테일’이 답…섞어라 이론도 학파도

키워드는 ‘칵테일’이다. 지적 다양성은 유지하되 사상은 이종교배를 하라는 것. 그 교배는 전혀 가능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학파 사이에서도 가능하다. 가령 자본주의의 생존능력에 관한 견해는 고전주의·마르크스·슘페터·제도학파의 결합이 ‘딱’이다. 정부개입이 알고 싶다면 신고전주의·개발주의에다가 케인스학파를 고루 섞어내면 된다. 전제는 하나. 이 모두 위에 군림하는 절대이론 혹은 절대학파는 없다는 거다.

‘망치를 쥔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는 논리를 깔았다. 특정 이론의 관점에선 특정 질문만 하고 특정 각도로만 보게 된다는 건데. 물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못이라면 망치가 최적합 도구다. 하지만 세상문제가 못뿐인 건 아니지 않나. 그러니 연장도 다양해야 할 수밖에.

경제학이 그간 쌓아둔 고정관념, 대책없는 고집, 신화 깨기로 시작한 도입은 칵테일이란 결말로 온건하게 수렴됐다. 결론 역시 ‘섞었다’. 만 가지 꽃을 한꺼번에 피워낸 ‘백화제방’을 이상향으로 그려냈으니. 그러자면 어떻게? 방향은 안토니오 그람시로 냈다. “지적으로는 비관주의, 의지로는 낙관주의를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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