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개 진주알로 다시 썼다, '태백산맥'

갤러리바톤 고산금 '한없는 관용' 전
인공진주로 책·문장 박아내는 작업
수없는 볼펜선에 얹은 진주 군락도
24년째 노동하듯 한알 한알 붙여내
1년간 사용하는 진주알 10만개 달해
  • 등록 2019-09-16 오전 12:45:00

    수정 2019-09-16 오전 12:45:00

작가 고산금이 서울 용산구 갤러리바톤서 연 ‘한없는 관용’ 전에 건 자신의 작품 ‘태백산맥’(2018) 앞에 섰다. 3만여개의 인공진주알이 160×116㎝의 나무패널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동녘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밤마다 스스로의 몸을 조금씩 조금씩 깎아내고 있는 그믐달빛은 스산하게 흐렸다. 달빛은 어둠을 제대로 사르지 못했고….”

조정래의 ‘태백산맥’ 첫 권 첫 장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1986년 세상에 나온 뒤 3년 뒤인 1989년 10권을 완간, 지금껏 850만부 이상 팔린 대기록을 보유한 대하소설. 새삼스럽게 ‘태백산맥’이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차지한 위상을 되짚으려는 게 아니다. 이 소설을, 이 자취를 기억하는 방법을 말하려는 거다. 첩첩이 쌓인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가장 영롱하고 가장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그 방법.

이런 거라면 어떨까. ‘태백산맥’의 첫 줄부터 수십 장을 한 자 한 자 나무패널에 붙여냈다면. 1m가 훌쩍 넘는 그 나무패널을 빼곡히 메워낸 게 지름 4㎜ 콩알보다 작은 진주였다면. 그렇게 모인 수많은 진주알이 마치 편집된 책의 한 쪽 한 쪽을 그대로 옮겨 채운 듯하다면.

작가 고산금(53) 얘기다. 진주알갱이로 ‘태백산맥’을 읽는, 아니 기억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 굳이 왜 이런 방법이어야 하나. “흔적을 남기고 시간을 남기는 일이다. 텍스트를 작업할 때 세계를 바라보는 생각이나 인식체계가 예전으로 돌아가 나는 그때의 감정을 더듬는다. 내 작업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다.”

고산금의 ‘동물농장’(2018). 영국작가 조지 오웰(1903∼1950)이 1945년 발표한 소설 ‘동물농장’ 중 7쪽부터 55쪽까지 내용을 발췌해서 옮겨냈다. 지름 4㎜ 콩알보다 작은 인공진주 수만개가 120×80㎝의 나무패널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지름 4㎜ 인공진주를 한 자 한 자 박아내

서울 용산구 독서당로 갤러리바톤. 작가의 장기이자 무기인 진주작업이 벽마다 그윽하게 걸렸다. 고 작가가 3년 만에 펼친 개인전 ‘한없는 관용’이다. 크고 작은 평면 37점이 조명 아래 은근한 빛을 낸다.

고 작가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바꿔내는 작업을 한다. 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도구는 다름 아닌 인공진주. 어느 순간 자신을 자극한 혹은 매료시킨 책과 문장을 인공진주로 박아내는 거다. 책과 문장의 영역을 애써 구분하진 않는다. “벌어지는 상황과 연관있는 텍스트를 고를 뿐”이란다. 조정래의 ‘태백산맥’(2018),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2018), 셰익스피어의 ‘햄릿’(2019) 등 문학작품은 물론이고 김정호의 ‘세한도와 제찬(그림에 대한 감상을 적은 시)’(2019), ‘황진이 시’(2019) 등 고전도 있다. 누가 보면 참 특이하다고 할 내용도 있다. 법전이다. 이번 전시에선 볼 수 없지만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대한민국 법체계의 근본이라고 생각해서 정리했다는 ‘헌법’, 국회의원들에게 화가 나서 만들었다는 ‘국회법’, 천안함이 침몰했을 때 제작했다는 ‘병역법’ 등. 이뿐인가. 발자크의 장편 ‘고리오 영감’, 빅토르 위고의 대작 ‘레미제라블’ 등 19세기 소설을 비롯해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2014년 발표한 문제작 ‘21세기 자본’도 리스트에 들었다.

고산금의 ‘황진이 시’(2019). 커튼처럼 늘어뜨린 흰색 천위에 진주알을 붙여낸 작품이다. ‘한없는 관용’ 전에 처음 나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렇다고 진중하고 심각한 내용만도 아니다. 전시장 한 벽에 조르르 걸려 작가도 관람객도 한 박자 쉬고 가자는 ‘관용’도 눈에 띄니까. 가수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2019), 이문세의 ‘옛사랑’(2019), 해바라기의 ‘내 마음의 보석상자’(2019), 조동진의 ‘제비꽃’(2019) 등 가요메들리가 그것이다. 그이의 엄청난 작품에 비하면 소소하다 할 작은 패널들이 숨 돌릴 여유를 제공한다 싶은 거다.

그런데 이들 텍스트를 진주알갱이로 어찌 다시 써낸다는 건지. 방식은 이렇다. 3자짜리 한 단어면 진주 세 알, 4자짜리 한 단어면 진주 네 알, 이런 식으로 단어묶음을 띄어쓰기대로 접착제(3M 그루 산업용)를 묻혀 한 자 한 자 정교하게 붙여나간다. 이렇게 쓰인 진주가 1년에 10만개쯤 된단다. 고 작가는 “2200개가 든 인공진주 묶음을 1년에 38팩 정도 구입한다”고 귀띔했다. 대작일수록 진주 수도 늘어날 터. 가로·세로 162×116㎝ 규모의 ‘태백산맥’은 3만 800여개, 2200개 묶음 14팩으로 완성했다.

고산금의 ‘태백산맥’(2018) 디테일. 3자짜리 한 단어면 진주 세 알, 4자짜리 한 단어면 진주 네 알, 이런 식으로 작가는 단어묶음을 띄어쓰기대로 접착제(3M 그루 산업용)를 묻혀 한 자 한 자 정교하게 붙여나간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래도 말이다. 진주알갱이가 아무리 무수하다 해도 작가 자신이 고독하게 쌓아낸 시간에 비하겠는가. 하루 꼬박 15시간씩 두 달 가까이 작업해 100호(162×130㎝) 화면 하나를 채워낸다고 하질 않나. 말이 좋아 ‘수행’이지 현실이 그런가. 알람에 맞춰 쉬는 시간을 챙겨야 할 만큼 온몸을 혹사하는 가혹한 중노동이나 다름없는 것을. 그것이 벌써 24년째라는데.

전공한 서양화도 팽개치고 진주와 전쟁을 벌인 계기는 의외로 단순했다. “미국 유학시절 어쩌다 들른 만물상에서 비즈를 발견한 게 발단이었다. 룸메이트 중 영문학을 전공하는 친구가 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시를 읊어대길래 나도 읽을 수 없는 시를 만들어보자 했던 거다.” 소일거리가 본격적인 작품으로 탄생한 건 2001년. 그 이전 해 뉴욕타임스에 실린 남북정상회담 관련 신문기사를 옮긴 것이 첫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수없는 볼펜선 흔적에 얹은 진주군락도

이번 전시작 중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시선을 끄는 작품이 있다. 순백의 캔버스가 아닌 다갈색이 강렬한 짙은 흑색 배경에 앉힌 진주작업. ‘메모리 보드’ 연작이다. 볼펜으로 까맣게 칠한 판화지에 손힘만으로 주름을 만들고, 그 주름에 흩뿌린 진주가 제멋대로 모이고 헤친 모양을 고정한 작업. 가로 길이가 3m에 달하는 ‘메모리 보드 8’(2019)을 비롯해 올해 작업한 4점을 선보였다.

작가 고산금이 ‘메모리 보드 8’(2019) 앞에 섰다. 유성볼펜으로 까맣게 칠한 판화지에 손힘만으로 주름을 만들고, 그 주름에 흩뿌린 진주가 제멋대로 모이고 헤친 모양을 접착제로 고정해 완성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듬성듬성 여백에 얹은 진주뭉치니, 텍스트 작업보단 수월했을까. ‘메모리 보드’의 압권은 판화지에 올린 볼펜선이다. 하얀 종이를 흑색으로 칠하는 밑작업을 기어이 해냈으니까. ‘셀 수 없이 그은 볼펜자국이 흔적을 만들고 그 흔적이 진주를 유인한다.’ 작가의 공식은 그거였다. 텍스트가 나타나기 이전 상태, 누군가의 생각뭉치로만 존재했을 원시성을 끄집어내 보자는.

“예전이 텍스트의 배열이었다면 요즘은 텍스트를 어찌 느끼느냐가 중요해졌다. ‘메모리 보드’가 여백을 준 것이다.” 읽히기보다 읽어내려 한, 누구나 읽을 수 있으나 아무나 읽을 수 없는 작가의 독특한 텍스트 작업은 기원이 있었다. 출생의 비밀이라고 할까. 정제되지 않은, 엉키고 끓는 생각덩어리를 깨고 나오는 일 말이다. 그러니 어느 하나 버릴 게 없다. “작업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있지만 나쁜 건 없다. 현상 자체를 옮긴 거 아닌가. 그러니 미워도 그냥 간다.” 전시는 10월 2일까지.

고산금의 ‘메모리 보드 4’(2019). 하얀 판화지를 유성볼펜으로 진하게 칠해낸 밑작업이 압권이다. 그 종이를 손힘으로 누르고 펴서 만든 주름에 흐르듯 고인 진주를 그대로 고정했다. 접착제에서 빠져나온 실선까지 살아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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