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퀴즈. 어린시절부터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으며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 시절 수학낙제생을 면치 못한 경제학자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다. 그는 또 누군가. 현대경제학에서 도저히 빼놓고 갈 수 없는 산이다.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란 저서로 죽어서까지 세계경제나 국가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중이다. 그런 그가 평생 시달린 게 있으니 “나는 못생겼다”는 자책 아닌 자책이란 것.
아무리 천재적인 경제학자라고 해도 사람인 이상 ‘영욕’은 있는 법. 그나마 여기까지는 ‘영’에 해당한다. 이들의 ‘욕’은 이제부터다. 크루그먼은 빛나던 통찰 따윈 내다버린 듯 엉뚱한 판단으로 망신을 자처한 적이 있다. ‘IT기술 발전은 생산성 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예측을 내놓은 것.
‘못난이’ 케인스에게도 늘 따라붙는 꼬리표가 있었다. 하나만 보고 둘은 못 봤다는 거다. 불황의 원인을 수요에서 찾은 그는 소비·투자를 끌어낼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뉴딜정책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1970년대 불황에 물가상승이 겹친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나면서다. 더 이상 힘을 못쓰게 된 것이다. 사생활에 붙은 딱지도 있다. 동성애자. 이튼스쿨 시절 친밀하게 지냈다고 알려진 버나드 스위딘 뱅크가 뒤늦게 관계를 부정했고, 발레리나와 결혼까지 했지만 호사가들의 입방정은 케인스가 유명세를 치르면 치를수록 불이 붙었다.
▲모든 이론엔 사생활이 있다
14명의 줄은 케인스를 기준으로 세웠다. 케인스를 따랐는가 반대했는가에 따라 양쪽으로 나눴다. 폴 새뮤얼슨, 존 갤브레이스 등 미국 케인스학파를 한편에, 케인스에게 목숨 걸고 덤빈 밀턴 프리더먼과 베커 등 신고전학파를 다른 편에 세웠다. 크루그먼과 스티글리츠 등은 신케인스학파로 다시 묶었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 시기. 이 불확실성 시대의 구원자는 단연 케인스였다. 고용을 창출하는 총수요가 반드시 완전고용을 달성할 만큼 국민소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모두를 사로잡았다. 안일한 수량화나 합리적 해석에서 나아간 ‘불확실성의 경제학’이란 게 만들어졌다. 그런데 케인스의 불확실성이 나온 배경을 저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유럽 붕괴를 직접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막대한 혜택을 누렸던 세계를 잃어버린 탓이라고. 다시 말해 젊은 엘리트였던 그가 불확실한 미래를 뚫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자 위기감에서 새로운 경제학을 구상하게 됐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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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범죄’에도 성립한다
1960년대 컬럼비아대에서 경제이론 시험이 있던 날. 베커가 고민에 빠졌다. 차를 어디에 세울 건가. 주차장까지 가면 늦을 게 뻔하고 길가에는 주차위반 딱지를 떼일 위험이 있다. 고민 끝에 베커는 길가에 차를 두고 시험장에 뛰어들어갔다. 다행히 딱지는 붙지 않았다. 그런데 베커는 갑자기 어떤 섬광을 느낀다. ‘범죄의 경제학’이란 것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이때를 시작으로 베커는 지난달 별세할 때까지 ‘경제학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불렸다. 경제학의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단 뜻이다. 실제 그는 경제학에 수학적 방법론을 적용해 인종차별·결혼·마약·자살 등 온갖 사회현상을 해명하는 일에 사활을 걸었다. 가족의 경제적 효용을 따지고 교육의 수익률을 계산했다. 저자는 그 배경에서 베커의 아내가 자살한 불행을 찾아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어
경제사는 단순히 경제학의 역사가 아닌 것. 책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애쓴 저자의 노고가 곳곳에 배어 있다. 덕분에 경제학자 14명의 부침은 인류가 갈 길을 그려낸 내일의 지도로 다시 제작되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영광은 물론 패배에까지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어디 경제학에만 해당되겠는가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