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호의 PICK]그리스 여신들, 결혼·섹스·폭력을 논하다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창작집단 LAS 대표작 3년 만에 재공연
그리스 신화 통해 페미니즘 이슈 다뤄
현대적 재해석에 맛깔나는 대사로 활기
  • 등록 2020-03-09 오전 12:30:00

    수정 2020-03-09 오전 12:30:00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그리스 신화를 대표하는 세 여신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가 우연히 한 자리에 모였다. 남편이자 아버지인 제우스가 올림푸스의 12신을 소집했는데 세 여신만 조금 일찍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나 안부를 나누는 세 여신. 그런데 이들의 대화가 조금 낯설다.

“아프로디테, 너 헤르미스와도 잤니?”(헤라), “헤라, 그냥 이혼해. 사랑도 다 끝이 있는 거야.”(아프로디테), “나는 절대 사랑은 안 할 거야.”(아르테미스)

신들치고는 무척 현실적인 대화는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콘텐츠그라운드에서 개막한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에서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연출가 이기쁨이 이끄는 창작집단 LAS가 2016년 소극장 산울림의 기획공연 ‘산울림 고전극장’으로 초연한 작품이다. 2017년 대학로로 무대를 옮겨 재공연을 한데 이어 3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라 관객과 만나고 있다.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의 한 장면(사진=창작집단LAS).


작품은 대지의 여신이었으나 제우스와의 결혼 이후 질투의 화신이 된 헤라, 사랑의 여신이지만 알고 보면 매일 밤 다른 남자를 만나는 욕정에 사로잡힌 아프로디테, 처녀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대화를 다룬다. 결혼이라는 영원한 관계,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삶, 남자에게 얽매이지 않는 주체성 등 서로 가치관이 다른 세 여신은 현대 여성의 다양한 모습과 맞닿아 있다.

그리스 신화가 주요 모티브지만 작품의 분위기는 굉장히 현대적이다. 원피스와 청바지 등 여신들이 입은 의상부터 그렇다. 이들의 대화는 사랑과 결혼을 지나 욕망, 섹스, 폭력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리스 신화를 통해 현대 페미니즘의 이슈를 다루는 극 전개가 흥미롭다.

맛깔나는 대사와 함께 신들에 대한 현대적인 재해석이 활기를 더한다. 제우스가 대표적이다. 신화 속에서는 절대적인 존재지만 작품에서는 여자를 얻기 위해서라면 성폭력도 저지르는 파렴치한 인물일 뿐이다. “제우스의 섹스는 9할 9푼이 강간이다”라는 대사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촌철살인에 능한 아르테미스가 남자 신들을 향해 “네가 지금 나보다 더 큰 권력을 쥐고 있는 건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냥 남자이기 때문이야”라고 호통치는 장면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서로의 다른 가치관 속에서 때로는 대립하고 답답해도 한다. 그러나 각자의 속마음을 알아가면서 서로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있음을 알아간다. 작품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남긴다. 다만 그 방법은 관객에게 열어둔 채 막을 내린다. 여신들의 이야기가 곧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라는 뜻일 것이다.

초연부터 헤라·아프로디테·아르테미스로 출연해온 배우 한송희·이주희·김희연이 이번에도 같은 역으로 출연한다. 한송희는 이 작품의 극작가로 제4회 서울연극인대상 극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우스·아레스·아폴론 역에 이강우·조용경이 더블 캐스팅됐다. 장세환이 헤르메스·헤파이토스·악타이온·아도니스·오리온 등 1인 다역을 소화한다. 공연은 오는 29일까지.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의 한 장면(사진=창작집단LAS).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의 한 장면(사진=창작집단LAS).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의 한 장면(사진=창작집단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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