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경계해야 할 '치명적 자만'

이상호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원장
  • 등록 2019-09-24 오전 5:00:00

    수정 2019-09-24 오전 5:00:00

상충되는 진영 간의 정치적 대결에는 다양한 전략이 동원된다. 최근 들어서는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공격하는 경향이 특히 두드러진다. 주장하는 내용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주장하는 사람이 어떤 진영에 속해 있는지를 따진다. 한동안은 비교 대상을 다르게 설정하는 전략도 많이 활용했던 것 같다.
과거 정부의 실정이나 폐해를 새 정부가 추구하는 이상이나 이념과 대비시키는 식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이념 대결에서도 비슷한 전략들이 활용되곤 했다. 19세기 자본주의의 비참한 노동 현실을 사회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고매한 이상과 비교하는 식이다. 이런 식의 전략은 본질과는 거리가 멀고, 패거리 정치의 편향성을 보여줄 뿐이다.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메신저가 아니라 메시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상은 이상과, 현실은 현실과 비교하면서 이상이 추구했던 결과가 현실에서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를 검증해야 한다. 이 같은 분석은 정치인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전문가의 영역이다. 하지만 정치 과잉의 한국 사회에서는 독립적인 전문가의 객관적인 분석과 주장이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다. 부득불 저명한 외국 학자의 주장을 끌어와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옹호한 저명한 외국 학자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하이에크를 꼽을 수 있다. ‘치명적 자만(1988)’을 비롯한 하이에크의 많은 저술들을 읽다 보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한 정치와 경제 이슈들에 대해서도 탁월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가 ‘잘못된 전제’에 기초한 오류였을 뿐만 아니라 ‘치명적 자만’에 빠진 것으로 단언했다. 사회주의는 ‘자원의 생성과 이용에 관한 전제가 잘못된 지식에 근거’했기 때문에 자신의 ‘목적과 프로그램을 달성하는 것이 사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사회주의는 사회주의가 약속한 것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논박되었다’. 그 증거로 사회주의자들이 이상화했던 유토피아(소련·쿠바·중국·유고슬라비아·베트남·탄자니아·니카라과 등)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라고 한다. 1989년과 1990년 초반에 걸쳐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도미노처럼 붕괴되었다. 연이은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은 많은 한국의 토착 사회주의자들이 전향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중국, 베트남 등은 시장개방과 교역 확대 및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하면서 비로소 가난을 벗어나 고도 성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오늘날 사회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한물간 낡은 이념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원래 사회주의자들은 ‘전통적인 도덕, 법, 언어를 완전히 다시 세우고, 그러한 기초 위에서 낡은 질서를 척결’하여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중앙정부가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자원의 생산과 배분 과정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와 같은 ‘자생적 질서’를 사회주의 경제와 같은 ‘계획된 질서’로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치명적 자만’이라는 것이 하이에크의 지적이다. 하이에크는 자본주의의 경제 질서가 확산한 것을 인간의 기획이나 의도, 음모가 아니라 진화론적 선택의 결과로 보았다. 진화론적 선택은 자원의 효용성을 높이는 쪽을 따른다.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따르는 집단들이 인구나 부의 놀라운 증가를 보여주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사회주의 경제 질서가 붕괴되거나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진화론적 선택의 결과다.

우리 사회는 변혁의 와중에 있다. 한편에서는 적폐 청산이란 명분하에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질서를 이식하고자 하는데, 그 실체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정부가 추진해 온 소득주도성장 정책만 해도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았는지, 그래서 성과가 미미한 것이 아닌지를 의심해 봐야 한다. 여전히 부동산시장이 안정되지 못한 이유도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도외시한 채 정부 규제만 강화한 탓이 아닌지 되짚어 봐야 한다. 개혁을 명분으로 한 치명적 자만에서 벗어나 역사 앞에 좀 더 겸허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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