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공대 교수 26명 'made in Korea'에 던진 돌직구

한국산업 위기 진단
선진국 모방에 익숙해져
창조적 설계 역량 부족
기업은 수직체계 타파하고
시행착오·경험 축적해야
……………………………
축적의 시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560쪽|지식노마드
  • 등록 2015-10-07 오전 6:17:30

    수정 2015-10-07 오전 8:36:32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한국은 붉은 여왕이 지배하는 나라의 앨리스다.”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동화 ‘거울나라의 앨리스’를 안다면 이해가 쉽다. 동화 속에서 붉은 여왕이 앨리스에게 이른 말이다. ‘제자리에 있고 싶으면 죽어라 뛰어라.’ 붉은 여왕의 있는 세계에는 이상한 특징이 있는데 주변 나라가 계속 움직이는 거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게 되고, 최소한 나란히 서기라도 하려면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야 할 수밖에. 앞서고자 한다면 말할 것도 없고. 이 행간을 풀어내면 이렇다. 한국을 둘러싼, 미국·일본·독일은 물론 중국까지 주변의 대표적 산업국은 계속 움직인다. 역시 어쩌겠는가. 어깨라도 견주려면 죽어라 뛰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뛰어나가려면 성장동력이란 게 필요한데 한국의 그것이 자꾸 멈춰서는 거다.

서울공대 교수 26명이 나섰다. 지난 2년여간 진행해온 프로젝트를 아우르며 한국산업의 위기를 진단하고 미래방향을 제시했다. 마땅히 ‘붉은 여왕 나라’의 경쟁자도 파악했다. 실제 이들을 한 프로젝트에 모을 수 있었던 건 점점 힘이 빠지고 있는 한국산업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진단한 결과 중요한 키워드가 걸려들었다. ‘축적’이다. 한국산업이 처한 경쟁력 위기의 알맹이를 까보니 ‘고부가가치 핵심기술’이 빠져 있고, ‘창의적 개념설계’를 다져낼 역량이 없더란 거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역량이란 게 하루아침에 물건 사듯 얻어낼 수 있는 게 아니란 데 있다. 시행착오를 분석하고, 시간을 들이고, 경험을 쌓고, 지식을 얹고, 이 모두를 다시 버무려 충분히 숙성시켜야 비로소 손에 쥘 수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단다. 책의 제목으로 삼은 ‘축적의 시간’은 이들 26인의 공통주제이자 공통분모며 실행의 동기이자 목적이다. 남은 건 두 가지. ‘축적의 시간’을 어떻게 벌 것인가와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책은 그 두 층위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다. 방식은 독특하게 인터뷰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이끈 이정동 교수가 26인을 각각 만나 사안을 던지고 답을 들었다. 내로라하는 공학분야 석학들을 한국산업의 멘토로 삼은 것이다.

▲모방형 성장 한계…개념설계 역량 축적해야

26인의 공통 관심은 창의적이고 근본적으로 개념을 제시할 ‘개념설계 역량을 만드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제까진 턱없이 부족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엔 한국산업을 지배해온 몇가지 그릇된 고정관념이 작용한다. 가령 ‘생산활동은 개도국으로 아웃소싱하고 한국은 고부가가치 지식노동을 해야 한다’ ‘첨단 특허 1건이 1만명을 먹여 살린다’ 등. 더 큰 문제는 이런 고정관념에 빠지는 이들이 산업계 의사결정자나 사회적 오피니언 리더라는 사실. 그간 압축성장을 거쳐온 이들이 스스로 창조적 경험을 축적하기보단 선진국의 개념을 받아 모방하고 실행하는 데 익숙해진 탓이 크다고 봤다. 지금의 산업위기는 그 모델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심화된 형태란 거다. 한마디로 축적된 경험이 없어서 생긴 부작용인 것이다.

그렇다면 ‘경험의 축적’이란 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화학산업부터 휴대폰산업까지 선진기업들의 기둥에는 단단한 기본이란 게 있다. 100년 이상을 축적해온 시행착오의 경험이란 거다. 그런데 한국이 오늘부터 100년을 셀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교수들이 주목한 건 중국이다. 산업화 시기가 한국과 비슷한 중국은 시간의 한계를 공간의 이점으로 극복했다. 선진국의 100년 개념설계를 중국은 단 10년에 10배 많은 사례 수로 대신했다는 거다. 중국 같은 땅덩어리도 없는 한국은 어쩔 건가. 방법은 하나란다. 산업계뿐 아니라 사회전체의 시스템을 축적지향으로 바꾸는 거다. 기업경영의 20세기형인 수직계열화를 내다버리고, 리스크를 공유하는 산학협력모델을 정착하고, 정부의 기술정책에 실패경험의 축적을 강화하는 내용 등으로.

▲“기초가 없는 융합은 말짱 헛것”

기술정책 부문에 멘토로 나선 김태유 교수가 강조한 건 제조업이다. 근대 산업화의 역사를 털어봤더니 결국 기술자와 기업인을 우대한 국가가 선진국이 되더라고 했다. 최근 위기를 겪는 유럽 몇몇 국가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위기의 원인은 취약한 제조업 경쟁력이었다.

나노기술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현택환 교수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요즘 융합연구가 아무리 대세라고 해도 공학·과학의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라고 했다.

토목구조를 살핀 고현무 교수는 “세계적인 강소기업이 많이 나올 수 있는 산업생태계 구축이 관건”이라고 잘라 말한다. 기초는 버리고 M&A로 덩치만 키운다고 축적된 경험이 확보될 리가 없다고 했다.

▲현장! 현장! 현장!

끝까지 현장의 소리를 반영한 것이 책의 미덕이다. 포장? 없다. 미학? 버렸다. 문 밖의 상황 그대로를 짚는 데 방점을 찍었다. 반도체장비 부문의 박희재 교수는 “현장의 공학적인 기초가 없는 융합은 모래 위의 성”이라고 단언했다. 그러곤 공과대학의 커리큘럼이 산업현장과 유리된 점을 안타까워한다. 유체기계의 강신형 교수도 “공대는 산업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즘 상아탑 붕괴를 우려들 하지만 어찌보면 26명의 교수는 기꺼이 자진해서 상아탑을 탈출했다. 그것도 첨단공학으로 중무장한 채. 정보통신(이병기)과 빅데이터(차상균)는 물론이고 항공우주(김승조), 차세대자동차(서승우), 섬유·소재(강태진), 반도체(김형준·이종호) 등으로 화려한 낙하산을 엮어서 말이다.

열린 사고로 구상한 진보적 제안도 있다. 전력전자 부문의 설승기 교수는 얻을 게 있다면 무엇을 마다하겠느냐는 입장이다. 눈치 안 보는 도전적인 젊은 연구자를 배출하는 중국에서 인재를 들여와야 한단다. 그러곤 과감히 한국의 인재와 섞어 경쟁을 시키란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답이 이제 보이는가. 하늘만 바라보지 말고 바닥을 다지란 것. 참조는 그만하고 창조를 하라는 것. “한국형 방정식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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