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청원했지?"…2차 피해자 양산에 무책임한 국민청원

청원인으로 의심·지목되면 꼼짝없이 누명
항의해도 청원글은 확인·수정·삭제 불가능
"억울한 얘기 듣겠다는 국민청원, 누굴 위한 제도인지"
  • 등록 2018-11-27 오전 6:30:00

    수정 2018-11-27 오전 7:39:49

[이데일리 김은총 기자] 지난 10월 6일 오전 10시. 가족과 함께 주말을 보내던 송승미 국가보훈처 복지정책과 주무관은 상급자로부터 황당한 문자를 받았다. 자신의 특별승진을 비판하는 글을 송 주무관이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렸으니 앞으로 가만있지 않겠다는 취지의 문자였다.

송 주무관은 글을 올린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흥분한 상급자는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며 송 주무관을 압박했다. 며칠 뒤 사내에는 송 주무관이 전남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강성 인사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았다. 대학 시절 송 주무관의 활동은 음악동아리 하나가 고작이었다.

송 주무관의 상급자가 문제 삼은 글은 지난 9월 13일 신원미상의 청원인이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보훈처 특별승진 적폐 특별감사·수사로 엄단 요구’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동의자가 9명밖에 모이지 않자 10월 5일 청원인은 같은 내용으로 다시 청원을 올렸다. 이 역시 청와대 공식답변기준인 20만명에 한참 못 미치는 215명의 동의자를 모으는 데 그쳤다.

송 주무관은 국민청원 게시판에 명시된 전화번호로 연락해 “억울하게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지만, 자신들은 상담원일 뿐 아무 권한이 없으니 우편으로 진정 민원을 보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송 주무관은 다시 국민청원 게시판 담당자에게 “청원인을 확인해줄 수 없다면 청원이 올라온 시간과 장소만이라도 알려달라”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이를 대조해보면 자신이 청원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담당자의 답장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오지 않고 있다.



현재 국민청원 게시판은 청원인의 신분과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비(非)실명제로 운영된다. 글을 올린 시간이나 기본적인 정보조차 공개되지 않는다. 이는 곧 2차 피해자를 양산하는 폐해로 돌아왔다. 청원을 올렸다고 의심받거나 지목되면 해명할 길이 없어 송 주무관처럼 억울한 누명을 쓸 수밖에 없다.

심지어 국민청원 게시판은 청원인 본인조차 글을 수정하거나 삭제할 수 없다. 청원이 불발로 끝나도 글은 사라지지 않는다. 청원이 최초 취지와 다른 내용으로 변경되는 것을 방지하고 청원참여자 의견을 보호하기 위한 청와대의 조치다. 돌려 말하면 청원으로 억울한 피해를 당하면 구제받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최근 ‘이수역 폭행 사건’ 관련 청원글이 사실과 다르다는 경찰의 중간수사 결과가 발표되며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제도의 개편을 요구하는 청원이 수십 건 올라왔다. 상당수는 청원 실명제를 제안했다. 무분별한 청원이 난무하는 현 상황을 진정시키고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반면 일부 전문가들은 “실명제 도입이 국민청원의 본질적인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 것”이라는 지적도 내놓고 있다.

목디스크 수술을 앞두고 병가를 제출한 송 주무관은 현재 정신과 치료를 함께 받고 있다. 상급자가 자신을 경찰에 고소한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손에 마비 증상까지 찾아왔다. 경찰 수사와 별개로 보훈처의 내부 감사와 국민권익위원회의 조사도 함께 진행 중이다.

송 주무관은 “누군가를 비방하는 글을 쓴 적도 없고 비방하는 글에 댓글을 달거나 동조한 적도 없다”면서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는 국민청원 제도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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