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범인이 된 대장균 [물에 관한 알쓸신잡]

좋은 세균, 나쁜 세균, 이상한 세균
  • 등록 2022-04-23 오전 11:30:30

    수정 2022-04-23 오전 11:30:30

[최종수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범인과 닮았다는 이유 때문에 죄인으로 몰려 옥살이를 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요? 몇 년 전 미국에서는 일명 ‘도플갱어의 죄’를 뒤집어쓰고 17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수감생활을 한 재소자가 있었습니다.

1999년 미국 캔자스 지역의 한 공원에서 끔찍한 무장 강도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피해자는 너무 당황해 범인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고, 사건 현장에서 범인을 특정할 만한 지문이나 물증도 발견되지 않아 수사는 난항을 겪었습니다.

진범인 Ricky Amos(왼쪽)와 누명을 쓴 Richard Jones. (사진=미국 캔자스주 교정국)


경찰은 두 명의 목격자 증언을 토대로 몽타주를 만들어 수사망을 좁혀 갑니다. 그 결과 몽타주와 일치하는 리처드 존스라는 사람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합니다.

리처드는 사건 발생 시간에 여자 친구와 함께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있었지만 재판부는 그의 주장을 묵살하고 여러 가지 정황 증거를 토대로 그에게 징역 19년형을 선고합니다.

억울함을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리처드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던 중 한 수감자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수감자가 다른 시설에서 복역할 때 리처드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본 적이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변호사를 통해 자신의 ‘도플갱어’를 수소문한 끝에 놀랍게도 자신과 너무나 닮은 진범을 찾아냅니다. 이 두 사람은 나이만 한 살 차이가 날 뿐 신장, 체중, 머리 스타일과 피부색도 똑같았습니다. 다행히 경찰이 재수사를 시작했고 존스는 복역 17년이 지나서야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오래 전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인과 인상착의가 닮았다는 이유로 평범한 40대 가장이 강도혐의로 두 달 넘게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가 진범이 잡힌 덕분에 풀려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경우도 알리바이가 확실했지만 경찰은 사건 당시를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피해자가 해당 남자를 범인과 닮았다고 진술하고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증거물이 차에 있었기 때문에 이 남자를 범인으로 지목합니다.

누군가와 닮았다는 이유로 영문도 모른 채 겪게 되는 이런 황당한 사연은 듣는 사람까지 공분하게 만듭니다. 누군가를 닮아서 겪어야 했던 황당한 일 중에는 억울함을 넘어 코미디 같은 사례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한 영화배우는 대통령을 닮았다는 이유로 10년 동안이나 방송정지를 당했고, 중국에서는 곰돌이 푸가 시진핑 주석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사전 검열 대상이 되었습니다.

닮지 말아야 할 누군가를 닮아서 괴로운 건 사람만이 아닌가 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도 마찬가지인데요, 닮지 말아야 할 세균을 닮아서 고달픈 대장균이 그 주인공입니다.

대장균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단어는 식중독입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식중독에 대한 걱정이 커지고, 식중독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장균을 범인으로 의심합니다. 그런데 만일 대장균이 자기는 범인이 아니라고 억울함을 주장하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미지=이미지투데이)


대장균은 이름 그대로 대장에 살고 있는 세균 중 하나입니다. 우리 몸의 대장에는 수백 가지가 넘는 세균이 살고 있고 그 숫자는 수십조나 됩니다. 이름 때문에 대장에 서식하는 대표 세균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대장균이 차지하는 비율은 0.1%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름이 그렇게 붙은 이유는 대장균이 가장 먼저 발견되었고 연구도 가장 많이 된 세균이기 때문입니다.

대장에 살고 있는 세균은 종류가 많은 만큼 역할도 다양합니다. 우리 몸에 좋은 세균, 나쁜 세균, 그리고 평상시에는 큰 역할을 하지 않다가 장내 환경이 달라지면 갑자기 증식해 설사와 통증을 유발하는 이상한 세균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비피더스균, 유산균은 대장에 살고 있는 좋은 세균입니다. 식중독에 관한 뉴스에서 자주 듣게 되는 황색포도상구균, 살모넬라, 장염비브리오균, 병원성대장균 등은 나쁜 세균입니다. 대장에서 살고 있던 다양한 세균은 배변을 통해 몸 밖으로 나온 다음 우리 일상생활로 스며듭니다.

몸 밖으로 나온 세균이 비위생적인 경로를 통해 음식물이나 물에 포함되면 증식을 통해 개체수를 늘려갑니다. 우리가 이 음식을 먹게 되면 장내 세균의 균형이 깨어지면서 식중독에 걸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어떤 음식이 식중독을 일으킬 위험이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음식이나 물에 식중독을 일으키는 나쁜 세균이 있는지 검사해 보면 됩니다. 그런데 나쁜 세균을 찾아서 검사하려고 하니 종류도 많고 분석하는 방법도 까다로워 만만치 않습니다.

다행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대변을 통해 몸 밖으로 나온 좋은 세균, 나쁜 세균, 이상한 세균은 같이 몰려다니기 때문에 이 중에서 가장 분석하기 쉬운 세균만 분석해도 나쁜 세균이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선택된 세균이 바로 대장균입니다. 대장균은 좋은 세균이지만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대장에 사는 다른 세균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검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행주나 김밥, 약수터에서 대장균이 검출되었다면 동물의 대변에 의해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식중독을 일으키는 나쁜 세균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대장균은 질병을 일으킬 가능성이 낮은 세균임에도 음식물의 위생 상태에 대한 간접적인 지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간 대장균을 식중독을 일으키는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대장균은 우리가 식중독 진범을 잡는데 도움을 준 유력 제보자였던 셈입니다.

■최종수 연구위원(박사·기술사)은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University of Utah Visiting Professor △국회물포럼 물순환위원회 위원 △환경부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자문위원 △대전광역시 물순환위원회 위원 △한국물환경학회 이사 △한국방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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