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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시리즈 영화는 세계 2차대전 이후 소련과 서방이 냉전 중일 때는 소련이라는 명백한 적을 설정해 놓고 본드가 세계 이곳저곳을 누비벼 서방을 위협하는 적군을 물리치는데 초점을 맞췄다면, 2000년대 이후 나온 영화는 테러리스트라는 보이지 않는 적이 만연한 달라진 시대 상황에 구시대 산물인 본드가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재정립하는 노력이 그려집니다.
영화 속 본드는 확실히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 본드 역의 남성 배우는 한 번 본드 역을 맡으면 4~5개의 007 영화에 연이어 등장하지만 본드 상대역인 본드걸은 매회 바뀝니다. 주로 관능적인 팜므파탈로 등장하죠. 정보 등을 빼내기 위해 접근한 본드의 하룻밤 상대거나, 본드에 빠져 결과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본드걸은 대체로 본드에게 목적 달성을 위한 일회성의 아름다운 도구로 나왔다가 사라집니다.
올해 들어 할리우드 영화계로부터 촉발된 성폭별 고발 캠페인 ‘me too’ 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이처럼 달라진 시대 분위기에 제임스 본드가 새로운 영화에서 어떻게 이미지 변신을 할지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더이상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여성을 유혹하고, 성적인 농담을 내뱉고, 목적을 이루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마초적인 이미지가 관객들에게 호응받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 여배우 주디 덴치가 연기한 MI6 수장인 ‘M’은 1995년 007영화 ‘골든 아이’에서 당시 피어스 브로스넌이 연기한 본드에 대해 ‘sexist, misogynist dinosaur, a relic of the cold war’(성 차별주의자, 여성 혐오자,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라고 표현했죠.
007 시리즈 제작자들도 제임스 본드 캐릭터와 본드걸에 대한 비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여러 변화를 시도하기도 했죠.
직전 007 영화 스펙터(2015년) 감독인 샘 멘데스는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다니엘 크레이그보다 4살 많았던, 당시 50세의 이탈리아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를 영화에서 범죄조직 수장의 미망인으로 등장시켰습니다. 영국 일간 텔레그라프에 따르면 멘데스 감독은 벨루치에 “본드가 역사상 처음으로 연상의 완숙미의 여성과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콘셉트는 혁명적이다”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세상에 나오자 평론가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벨루치가 단지 본드보다 나이만 조금 많았지 본드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그녀에게 접근하고, 정보를 얻자 다음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기존의 행태는 여전히 되풀이 됐거든요.
이에 대해 본드 영화 신작의 각본과 메가폰을 담당하는 보일 감독은 “새로운 본드걸은 본드의 전통을 이어가되 현 시대를 반영해 쓰일 것”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과연 새로운 007 영화가 본드걸이 21세기 여성상을 반영하고 본드와 본드걸의 관계도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관계로 묘사하는 획기적인 변화를 담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본드의 남성성을 지나치게 부각한 전통을 이을까요.
한편 현실 세계의 영국 해외정보부 MI6도 가상 인물인 제임스 본드의 의해 씌워진 기관의 마초적 이미지를 지우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엘리트 집단으로 꼽히는 정보부는 영국인 부모를 가진 백인이 대부분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번 광고는 소수인종, 여성, 다양한 배경의 구성원들을 모집하기 위해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원래는 부모가 모두 영국인이어야 지원이 가능하지만 이민자 부모를 뒀더라도 영국 출생이면 지원할 수 있도록 규정도 바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