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와 함께 하는 한국의 섬] 세월호 5주기, 진도군 거차군도를 찾아서

세월호 5주기 추모여행
진도군 거차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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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트립in 이승희 기자] 섬은 아픔이 많다. 4월은 더더욱 그렇다. 제주가 그랬고 진도가 그렇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사고가 진도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진도에 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 2017년 4월 이생진 시인(91세)과 맹골도에 갔다. 그곳에서 세월호 3주기 추모제를 지내 주었다.

작년에도 세월호 4주기 추모제를 겸해서 거차도 여행에 도전했으나, 풍랑으로 진도항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교통이 좋아졌지만, 진도는 여전히 서울에서 가장 먼 곳 중 한 곳이다. 서울에서 6시간을 달려, 진도항에서 다시 3시간 넘게 배를 타야 만날 수 있는 머나먼 섬. 독도 만큼이나 가기 힘든 섬이 거차군도 섬들이다.

진도항에 도착하니 깃발은 간데없고, 앙상한 깃대만이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전 9시 50분 거차도행 여객선을 탔다. 진도항을 떠난 한림페리 11호(297톤급, 정원여객 275명)는 조도 창유항을 지나 나배도, 관사도, 소마도, 모도, 대마도를 거쳐 국립공원 명품 마을인 관매도에서 승객 대부분을 내려놓고 동거차도로 향한다.

거차도에 가는 사람은 우리 일행과 조도초등학교 거차분교 선생님 한 분, 그리고 인간극장에 출연했던 정해석씨 뿐이다. 정해석 씨는 가수 생활을 하다가 섬에 홀로 남겨진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서거차도로 귀향했다. 자전거를 타다가 팔을 다쳐 광주에 있는 병원에 치료차 나갔다 섬으로 들어오는 길이다. 저녁에 정해석씨 집에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동거차도를 거쳐 12시 50분 서거차도에 도착한다.

동거차도, 서거차도, 상죽도, 하죽도 4개의 유인도와 그 인근의 무인도를 합쳐 ‘거차군도’라 한다. 거차도는 백제 시대 제주도를 왕래하면서 ’거쳐 가는 섬’이라는 말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물살이 거친 섬’이라는 뜻에서 거차도라고 불렸다고 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지금도 먼바다를 항해하는 선박들은 맹골수로가 있는 거차군도의 거친 바다를 거쳐가고 있다.

5년 전부터 전화 연락만으로 알고 지냈던 서거차도 박권삼 전 이장님이 마중을 나왔다. 그의 조카 집에 여장을 풀었다. 서거차도는 아직 변변한 민박집이 없다. 40년 전 경북 의성에서 시집왔다는 그의 조카며느리가 식사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농어미역국에 섬에서 나온 생선과 나물들로 차려진 맛깔스러운 자연산 섬 밥상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맛있다! 맛있다! 탄성으로 가득한 점심식사였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제를 지내기 위해 동거차도로 갔다. 동막마을에서 동육마을로 싸목싸목 고개를 넘어갔다. 동육마을에서 세월호 감시 망루가 있던 산마루를 향해 올랐다. 마을 꼭대기 통나무집을 지나 대나무 숲길을 걸었다. 대숲을 지나니 동백나무 숲길이 나왔다. 빨간 동백꽃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먼저 간 아이들의 혼을 담고 있는 것 같아 꽃을 밟을 수 없었다. 망루를 오르내렸던 많은 사람이 기원을 적었던 리본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숨이 조금 차오를 때쯤 망루가 있던 산마루에 도착했다.

동거차도와 병풍도 사이 바다 위에 부표 하나가 떠 있다. 세월호 침몰사고 지점이다. 전 국민이 안타까워 발 동동 구르던 그때의 모습이 필름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준비해간 제물을 올리고, 술을 따랐다. 먼저 간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살아남은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한 기도였다. 5년 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었다. 다음 동거차도 여행에는 편한 마음으로 천연기념물 505호 동거차도 구상 페페라이트(peperite)를 보고 싶다.

서거차도로 돌아와 마을 탐방에 나섰다. 윗마을로 향했다. 윗마을 끝 지점에 저수지가 있고, 그 아래 정원이 예쁘게 꾸며진 집이 있다. 여객선에서 만났던 정해석씨 집이다. 현관문 옆으로 정해석, 박봉엽이라고 쓰여진 문패가 달려있다.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집안을 구경했다. 집안에는 우물이 있다. 예전 가옥을 최대한 살려 리모델링한 것이다. 윗마을에는 유채꽃과 보리밭이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다.

아랫마을에 있는 조도초등학교 거차분교에 갔다. 총각 선생님이 나와주셨다. 배에서 만났던 선생님과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이라고 했다. 분교에는 선생님 3명과 학생이 8명이다. 8명 학생 중 2명은 할머니 학생이다.

서거차도 허학무 이장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이장님은 탤런트 허현호 씨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세월호 침몰사고 때에도 서거차도 이장직을 맡고 있었다. 세월호 침몰사고 현장의 아픈 그 날의 역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장님이 창소리를 들려주었다. 피는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창소리에는 진도의 아픔이 가득했다.

세월호 선체를 인양해 목포 신항만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기름 유출 등으로 주민들에게 큰 피해가 발생했다. 이장님도 전복과 미역 양식장에서 11억 원의 큰 피해를 봤다. 그러나 한 푼도 보상금을 받지 못했다. 거차군도 어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진도군민의 아픔을 들어주고, 눈물을 닦아줄 때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서거차도 서쪽에 있는 모래미 마을로 갔다. 마을 뒤편 상마산(150m)에 올랐다. 산 정상에 오르니 죽도, 맹골도, 곽도 등 맹골군도가 보인다. 동거차도와 병풍도 사이 세월호 침몰사고 현장도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관매도와 조도군도 섬들이 바다위에 새떼처럼 떠 있다. 산 능선을 타고 조도군도의 멋진 풍경을 눈에 담고 싶었으나, 아직 등산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서거차도 아랫마을 뒤편 해안으로 갔다. 해안에 들어서는 순간 숨이 멈추었다. 울릉도 송곳봉과 너무 많이 닮아 있었다. 해안 입구에는 관매도 콩돌 바위를 닮은 바위가 암벽에 세워져 있다. 서거차도의 숨겨진 비경이다. “세월호 침몰 사건의 아픔으로 그동안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서거차도의 명소로 거듭나길 바란다.

기상청 오보 때문에 섬에서 나갈 수 있을까? 거차군도 여행 내내 가슴을 졸여야 했다. 섬사람들의 일상이다.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거차군도 섬사람들은 이중의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웃음은 잃지 않았다. 거차군도 사람들의 애틋한 정을 가슴에 담은 나그네를 싣고, 여객선은 진도항으로 향했다.

여행 정보

거차도를 운항하는 여객선이 출발하는 곳은 목포항과 진도항(팽목항) 두 곳이다.

8:30 목포항에서 출발한 여객선은 30여 개 섬을 거쳐 18:00쯤에 서거차도에 도착한다. 국내 최장 여객선 노선이다. 선상 유람을 겸한 여행객 이외에는 권하지 않는다.

9:50 진도항(팽목항)을 출발한 여객선은 12:40 동거차도항을 거쳐 13:00 서거차도항에 도착한다. 이 여객선은 다시 13:20 서거차도항을 출발하여, 13:40 동거차도항을 거쳐 16:40에 진도항(팽목항)으로 나온다.

짝숫날에만 운항하는 맹골도행 여객선은 9:00 진도항(팽목항)을 출발하여 12:27 서거차도항에 도착한다. 맹골도를 다녀온 여객선은 14:06 서거차도항을 거쳐 진도항(팽목항)으로 나온다.

거차도 여객선 운항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진도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교통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동거차도와 서거차도에는 정식으로 민박 영업을 하는 곳이 없다. 가정집에서 민박집처럼 묵을 수 있다. 숙식 인원도 소규모다. 각 섬의 이장님께 요청하면 된다. 이장님 연락처는 진도군 조도면사무소에 연락하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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