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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황현규 기자] 경기도 안양시 공사현장에서 목수로 일하는 정병철(45)씨는 근무시간인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딱 3번 물을 마신다. 아침 9시와 낮 12시, 오후 3시다. 최고 기온이 35도가 넘는 폭염 경보가 발효된 날에도 마찬가지다. 정씨는 “정해진 시간 외 물을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는 없지만 괜히 물 마시면서 쉬는 모습을 보여주면 일감이 줄어들까 눈치를 보게 된다”며 “요새처럼 기온뿐만 아니라 습도까지 높으면 이러다가 죽겠지 싶다”고 밝혔다.
폭염에 노출된 야외 근로자들의 노동 안전이 올해도 위협받고 있다. 정부가 마련한 ‘야외 근로자를 위한 불볕더위 지침’이 있지만 사실상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지적이다. 가이드라인 수립에서 끝나는 게 아닌 실질적인 이행을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침마다 동료끼리 얼음 쟁탈전…”
우리나라 여름 날씨가 점점 고온다습한 아열대 기후로 바뀌고 있지만, 갈수록 열악해지는 환경에서 일해야 하는 야외 근로자들의 처우는 나아지는 게 별로 없다는 지적이다. 40년째 서울 시내 공사장에서 일하는 김태범(65)씨는 “여름철 공사 현장은 올해도 달라진 게 전혀 없다”며 “그늘도 없고, 물을 마시며 잠깐 쉴 수도 없는 게 현실”이라고 전했다. 서울 종로구 한 공사장의 목수 안모(55)씨도 “이 날씨에 안전모에 안전재킷까지 입고 있으면 진짜 아프리카에 온 기분”이라며 “특히 점심 먹고 다시 일을 시작할 때는 어디로 도망가고 싶다”고 토로했다.
결국 이들은 대책을 촉구하며 청와대까지 갔다. 13일 오전 전국건설노동조합은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글이글 타는 태양 아래 그늘막도 없는 곳에서 한뎃잠을 자고 아무데서나 팬티바람에 옷을 갈아입고 있다”며 “아침마다 얼음 쟁탈전을 벌이면서 동료들끼리 서로 초라해지는 기분을 느낀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또 “여름철만 되면 반짝 관심을 가지다 마는 국회와 정부에 실망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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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노동자들을 위한 정부의 폭염 가이드라인이 있지만 현장에서는 사실상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야외 사업장은 폭염경보나 폭염주의보 발령 시 △1시간에 10분·15분 휴식시간 제공 △시원한 물 제공 △현장 그늘막 설치 등을 해야 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산업안전보건기준법에 따라 징역 5년 이하 혹은 벌금 5000만원 이하의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건설 노조의 자체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야외 근로자 382명 중 절반 가량(45.5%)이 폭염 가이드라인에 대해 들어본 적조차 없는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폭염경보·주의보 발령 시 ‘1시간에 10분·15분 휴식시간을 제공받는다’고 답한 근로자는 23.1%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쉬지 않고 봄·가을 처럼 일한다(18.2%)’거나 ‘재량껏 쉰다(58.2%)’고 응답했다. ‘그늘막을 제공 받고 있다’는 응답자는 26.5%에 그쳤다.
채여라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근로자들이 야외에 쉴 공간이 없어도 너무 없다”며 “얼음 재킷, 물 지급 등 현실적으로 마련할 수 있는 작은 대책부터 정부가 신경 써서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