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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기술만이 능사가 아니지요. 핀테크(Fintech·IT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금융)는 기술력만으로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금융의 본질은 결국 ‘신뢰’이지요.”
금융석학 로버트 머튼의 뼈있는 조언
세계적인 금융 석학으로 꼽히는 로버트 머튼 매사추세츠공대(MIT) 석좌교수는 27일 세계경제연구원 주최로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조찬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머튼 교수는 금융에 수학을 접목해 전세계 파생상품 시장을 확 키운 금융 전문가다. ‘파생상품의 가치측정 방법론’으로 1997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지금은 미국 투자회사인 디멘셔널(Dimensional)에서 금융투자와 금융산업 전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머튼 교수는 “금융시장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양질의 금융시스템은 경제 성장의 큰 부분을 담당한다”며 “금융 혁신은 성장의 밑받침”이라고 운을 뗐다. 이어 “핀테크는 시간을 아끼고 비용을 줄이는 등 금융을 편리하게 할 수 있지만, 기술 그 자체만을 수반하는 핀테크는 결국 금융의 본질인 신뢰의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머튼 교수는 그러면서 “복잡한 금융서비스에는 고객이 시스템의 운영 원리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는 없는 본질적인 불투명성이 있다”며 “그런 분야는 충분한 검증과 고객의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고 했다. “기술 그 자체가 신뢰를 위해서는 충분하지 않다”며 “투명성 혹은 검증이 신뢰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머튼 교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도 회고했다. “금융위기 이후 금융산업에 대한 신뢰가 급전직하 했습니다. 사전에 설정된 규칙에 따라 주관적인 판단이 배제된 ‘패시브펀드’에 수조달러가 유입됐어요. 반면 펀드매니저들이 적극 운용하는 ‘액티브펀드’는 자금이 급감했습니다. 투자자들이 단순히 수익률 하락을 염려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액티브펀드 자체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그는 이어 “만약 고객이 금융사를 믿는다면 고객마다 다른 수수료를 부과한다고 해도 고객이 이탈하지 않을 것”이라며 “신뢰를 전략적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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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성장 기치 내건 文정부 교훈될듯
머튼 교수는 금융당국의 역할도 강조했다. 그는 “미국 식품의약품청(FDA)의 의약품 시판 허가 과정은 매우 복잡하지만, 승인을 받았으니 복용해도 될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며 “금융당국도 신뢰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핀테크 산업이 활성화하려면 고객과 금융서비스 제공업체, 금융당국이 서로 신뢰라는 ‘신뢰의 트라이앵글’이 형성돼야 한다”고도 했다.
머튼 교수의 주장은 문재인정부의 금융정책에도 뼈있는 조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인터넷전문은행, 오픈 API 등 혁신 금융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이날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산업 혁신을 잘 이해하고 뒷받침할 수 있도록 금융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바꿔 나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금융권 일각에서는 기술 모양새만 앞세운 생색내기라는 냉정한 평가도 없지 않다. “구성원은 그럴 듯한데 기존 시중은행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는 지적을 받는 인터넷전문은행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금껏 경기 침체든 경기 과열이든 금융시장에 불확실성이 없었던 적이 있었나”라며 “모든 걸 안전하게 가져간다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고 했다. 모든 상황이 확실하다면 화폐이론과 정부국채만 있으면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머튼 교수는 “통제할 수 없는 여러 변수를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 지가 금융정책의 핵심”이라며 “불투명한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라는 게 현실적인 조언”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