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가 되고서야 벌레였다는 걸 알기 전에…인문학!

문학·역사·경제 글 36개 주제 3권에
다양다층 '집단지성' 시너지 입혀내
………
퇴근길 인문학 수업: 멈춤·전환·전진 (전3권)
백상경제연구원|각권 512·460·472쪽|한빛비즈
  • 등록 2018-10-24 오전 12:12:00

    수정 2018-10-24 오후 2:30:09

미로에 던져진 듯 온통 혼란스러운 세상살이. ‘퇴근길의 인문학 수업’은 인문학에서 그 길을 찾으라 이른다. 똑 떨어지는 정답을 준다는 게 아니다. 정답에 다가설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는 얘기다. 꽉 잠긴 문 앞에 선 이들에게 던진 열쇠꾸러미라고 할까(사진=이데일리DB).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변신’을 읽어봤다면 말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몸부터 더듬어본 경험이 있을 거다. 하지만 뒷목이 잡힌 듯한 섬뜩한 불안감은 그 이상이다. 변신 자체보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을 즉각 벌레로 공식화한 가족의 반응 말이다. 비극적 결말은 일단 접고, 비극적 상황 한 토막만 보태자. 잠자의 마지막 선택을 몰아간 명제. “밥벌이를 하지 못하는 밥벌레는 해충일 따름이다.”

벌레다. 책의 시작이 그렇다. 다분히 의도한 벌레이지 싶다. 행간이 읽힌다는 뜻이다. 세상에 벌레는 많으니까. 일벌레·밥벌레·돈벌레 등등. 사안은 다르지만 공통점이라면 벌레가 되고서야 자신이 벌레였다는 걸 알게 된다는 거다. 그것도 운이 좋아야. 그 극적인 현실은 4차 산업혁명 기운이 스멀스멀 뻗쳐오르는 세상 귀퉁이에서도 펼쳐지고 있는데. 방법은 없나? ‘벌레 박멸’ 말고 ‘벌레 구제’ 말이다. 있다. 인문학이다. 똑 떨어지는 정답을 준다는 게 아니다. 정답에 다가설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는 얘기다. 꽉 잠긴 문 앞에 선 이들에게 던진 열쇠꾸러미라고 할까.

인문학에 얹은 무한한 신뢰와 막중한 책임은 이 책 ‘퇴근길 인문학 수업’에 들어 있다. 한 통에 꾹꾹 눌러 담기도 빠듯했던 무거운 주제 36가지를 3권에 12장씩 고르게 펴놓은 책이다. 몇 해 전부터 출판계에 이는 바람인 ‘넓고 얇은 지식의 집합체’인 셈이다. 보름 간격으로 한 권씩 내놔 3권을 완간했다. 각각의 부제는 ‘멈춤’ ‘전환’ ‘전진’. 인생의 방향성을 고려한 제안이란다. 멈춰서 돌아보고 제대로 나아가자는 뜻일 거다.

바탕이 있다. 백상경제연구원이 서울시교육청과 5년여에 걸쳐 이어온 강연 ‘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다. 학생·시민을 대상으로 선뵀던 콘텐츠를 다시 걸러 묶었다. 36개 주제는 예상할 수 있는 그대로다. ‘문·사·철’로 불리는 전통 문학·역사·철학은 물론 경제·사회·심리, 연극·영화·음악·건축·미술, 과학·생태·건강·지리·천문 등등. 대단히 다양하지만 그다지 심오하다곤 할 수 없는 ‘인문학 지식 모음’이다.

눈여겨볼 것은 ‘집단지성’. 어느 특별한 필자의 깊이에 굳이 의존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대신 다양다층의 시너지를 택했다. 광범위한 주제만큼 인문학자는 물론이고 경제학자·배우·소설가·번역가·평론가·의사·건축가 등 동원가능한 전문가 풀을 구성해 한 주제씩 맡겼다. 입맛만 다시게 할 조합이려니 방심할 것도 아니다. 3권을 합친 분량이 1444쪽에 달하니.

△1444쪽에 헤쳐 모은 인문학 맞춤 읽기

귀한 물건 ‘명품’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는가. 과거와 현대라는 시대적 구분이 약간은 필요한데. 재료의 가치나 장인의 명성이 예전 명품을 만들었다면 요즘은 기업이 제조한 ‘신기루’로 양산한단다. 그럴듯한 스토리텔링과 역사·욕망이 결합한 이 신기루의 핵심은 ‘장인정신’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외주로 생산했을지언정 브랜드스토리엔 장인의 드라마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봐야 할 게 있다. ‘말과 자동차’란다. ‘삼국지’에서 동탁이 여포에게 선물했다는 ‘적토마’, 알렉산더대왕의 ‘부케팔루스’, 나폴레옹이 초상화에 즐겨 등장시킨 ‘마렝고’가 볼보·포드·벤츠 등으로 탈바꿈했을 뿐.

화가가 사망하면 정말 그림값이 오르는지도 궁금할 터. 공급량이 제한돼 희소성이 커진다는 수요공급논리를 기대하는 건데, 변수가 하나 있다. 시장이 찾는 작가고 작품이어야 한다는 거다. 단순한 경제논리가 아니란 뜻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평생 1만 6000여점을, 박수근은 500여점을 남겼다는데. 그렇다고 박수근의 작품이 피카소보다 더 비싸게 거래되진 않는 것처럼 말이다.

조선의 범죄수사는 상상 이상으로 치밀했다. 살인사건이 나면 조사 두 번은 기본이고, 두 번의 결과가 일치해야 마무리를 했단다. 조선의 공식법의학서였다는 ‘무원록’이 그 방증. 과학적인 방법을 총동원해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는 절차·도구·검안서식 등을 세밀히 기록했다.

이 정도면 맛보기가 됐을까. 책의 미덕은 ‘디테일’이다. ‘퇴근러를 위한 30분 프로젝트’라 명명한 대로 월∼금요일 한 꼭지씩 배치한 친절한 구성이 눈에 띈다. 이 내용으론 뭔가 부족하다? 그럴 줄 알고 붙인 팁도 쓸 만하다. 더 알고 싶은 지적 탐구에 단 레퍼런스, 아니면 각주로라도 신경을 썼다. 틈새를 공략한 이 맞춤 읽기의 특징은 ‘종횡무진’이다. 그 때문인지 모바일 글 읽기가 종이로 튀어나온 듯한 분위기도 풍긴다.

△큰 그림보단 세부묘사에 공들여

한국에서 인문학의 이중성은 끝 간 데까지 간 듯하다. 기업이나 정부기관에서 자리만 마련되면 한마디씩 붙이는 ‘인문학적 접근으로 돌파구를 찾겠다’는 선언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돈이 되고 고용을 창출하고 혁신의 중심이라 외친다. 물론이다. 잘 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가 미국 내 고소득자의 전공을 한번 따져봤단다. 철학·정치학·역사학 전공자들이 줄줄이더란다. 증권·금융에다가 스타트업 설립자까지 3분의 1이 인문학을 전공했더란 분석을 내놨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미국 얘기고. 한국에서 인문학은 여전히 행운이 따라야 매듭이 풀리는 신의 경지다. 정작 돈과 고용과 혁신의 중심으로 인문학을 끌어내려는 체계적인 노력이란 게 안 보이니까. 오죽하면 “인문학을 전공해서 미안하다”란 탄식까지 나왔을까. 괜한 너스레가 아니다. 어디 쓰일 곳도 없는 인문학을 공부해 경영학·공학 등을 전공한 이들에게 빌붙어 사는 듯한 자괴감을 유발하는 사회분위기 탓이다.

말로만 대우할 뿐 시쳇말로 ‘뒷방 노인네’ 취급을 하는 인문학이라. 하지만 끝까지 그럴 건가. 그렇게 방치하다간 허를 찔릴 수 있다는 경고를 책은 조근 조근 들이댄다. 당장 인문학의 숨은 병기를 다룬 36개의 주제가 아니었다면 세상은 참 칙칙했을 거란 자극부터 ‘때린다’. ‘세상을 어찌 바꿀 건가’란 큰 그림 그리기는 제쳐뒀다. 대신 ‘이런 소소한 점들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세부묘사에 공을 들였다. 복싱으로 말하면 한방 ‘어퍼컷’이 아닌 연방 ‘잽’인 거다. 쪼가리지식으로 뭘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마라. 그조차도 제대로 못 챙기고 산다면 말이다.

이데일리
추천 뉴스by Taboola

당신을 위한
맞춤 뉴스by Dable

소셜 댓글

많이 본 뉴스

바이오 투자 길라잡이 팜이데일리

왼쪽 오른쪽

스무살의 설레임 스냅타임

왼쪽 오른쪽

재미에 지식을 더하다 영상+

왼쪽 오른쪽

두근두근 핫포토

  • 꼼짝 마
  • 우승의 짜릿함
  • 돌발 상황
  • 2억 괴물
왼쪽 오른쪽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