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라희에게도 팔지 않은 강단…'불각의 미'

'김종영, 붓으로 조각하다' 전
'구태여 깎지 말라' 한 철학 깃든
글씨-드로잉-조각 전이과정 조명
한국추상조각 선구자로 불리지만
수채·드로잉·서예 등 5000점 달해
180여점 뽑아 서예박물관에 내놔
  • 등록 2018-01-15 오전 12:12:00

    수정 2018-01-16 오후 1:07:05

김종영의 서예작품 ‘불각재’(不刻齋·연도미상·위). 구태여 깎지 말라는 ‘불각의 미’는 김종영이 한평생 붓과 정에 붙이고 다녔을 철학이다. 철학이 글씨로, 글씨가 드로잉으로, 드로잉이 조각으로 전이되는 과정은 ‘김종영, 붓으로 조각하다’ 전에서 눈여겨볼 지점. 가는 몇 줄의 선을 펜으로 그어 완성한 ‘드로잉’(1973·왼쪽)은 나무조각 ‘작품 73-1’(1973)의 기원이 됐다(사진=김종영미술관).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한 사람의 생애가 이토록 적나라하게 조각돼 나선 적이 있던가. 아니 강렬한 한 획 붓끝에 휘감겨 일필휘지로 씌어 걸린 적이 있던가. “아름답다” 외에 덜고 얹을 것도 없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라고 무심하게 말한다.

“나는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을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기법과 작품의 형식은 예술을 위해서 사용되는 방법일 뿐 내 예술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김종영 에세이 ‘아름다운 것’ 1960년대).

우성 김종영(1915∼1982). 세상은 그를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란 타이틀로 ‘편리하게’ 가름한다. 추상이 뭔지, 이런 것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헷갈려하던 시절이었다. 특이한 조형언어로 돌·나무·철 등을 알 듯 모를 듯 깨내고 다듬고 뭉쳐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시대를 앞선 그이의 작품은 감동보단 이해 못할 덩어리였다. 하지만 정작 김종영의 시작점은 따로 있다. 그가 남긴 작품은 5000여점을 훌쩍 넘긴다. 수채·유화·드로잉이 3000여점, 서예작품이 2000여점, 조각품은 300여점이다. 그러니 묵직한 중압감에 눌렸다고 ‘편의상 조각가’로만 몰고 갈 일이 아니란 얘기다.

김종영이 1953년 제2회 국전에 출품했던 나무조각 ‘새’(연도미상·왼쪽)와 철제조각 ‘전설’(1958). 김종영을 ‘한국 추상조각 선구자’로 부르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불멸의 조각품’이다(사진=김종영미술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 그 ‘장구한 배경’이 펼쳐졌다. 박물관이 기획전 ‘20세기 서화미술거장’의 첫 인물로 선정해 세운 ‘김종영, 붓으로 조각하다’ 전이다. 180여점을 걸고 세웠다.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상설전시해온 초기 추상 나무조각 ‘새’(연도미상)와 철제조각 ‘전설’(1958), 나무에 색을 입힌 ‘작품 80-1’(1980) 등 불멸의 조각품을 대거 옮겨왔다. ‘금강전도’(1973), ‘삼선동 풍경’(1976) 등 시대별 ‘드로잉’은 물론이고, 초기 유화인 ‘동소문고개’(1933), ‘고향집’(1935), ‘소녀상’(1938) 등도 따라나섰다. 시대별로 같이 나이 들어온 ‘자화상’ ‘자화각’ 수 점도 함께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집중할 건 서예작품이다. 굳이 김종영이 서예박물관으로 나들이를 나선 까닭이기도 하니까. 창원 고향집에 붙였던 현판 ‘사미루’(四美樓)부터 ‘장자 천하편 판천지지미’(1967), ‘자연중 유성법’(연도미상), ‘가지위’(1967), ‘그림을 보는 법’(1973) 등. 비로소 ‘서·화·각’의 경지가 눈에 박힌다.

김종영의 ‘자화상’(1975)와 ‘자각상’(1971). 김종영은 자화상과 자각상을 유독 많이 남겼다. 1975년 환갑인 해에 그린 ‘자화상’에는 오른쪽 여백에 두보의 ‘단청인증조장군패’를 적어뒀는데, ‘그림을 그리느라 늙어가는 것도 모르나니 내게 부귀는 뜬구름 같구나’란 뜻이다(사진=김종영미술관).


△‘불각의 미’로 ‘글씨-드로잉-조각’의 접점

1915년 경남 창원서 태어난 김종영은 영남 사대부가의 후손답게 선비교육을 받았다. 시서화는 기본. 다섯 살부터 아버지에게서 한학과 서예를 배우고 익혔다. 17세 휘문고보 재학 중에 나선 ‘제3회 전조선학생작품전람회’(1932)에서 중등부 습자 장원을 받은 건 어찌 보면 수순이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한 그는 1948년 서울대 미대에 부임해 1980년 미대 학장을 지내고 퇴임하기까지 교단과 작업실만을 오가는 생애를 살았다.

탄탄한 재능으로 서양회화와 조각 등 동서양 미학의 기본기를 만들어낸 김종영의 서화작품이 세상에 공개된 건 10년이 채 안 된다. 겸재 정선이나 추사(완당) 김정희의 글·그림에 빠져든 배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겸재의 ‘만폭동도’를 모방해 거침없는 선과 색으로 채운 드로잉 ‘만폭동도 방작’(1970년대 초반), 추사의 ‘세한도’에서 모티브를 얻어 당시 살던 서울 삼선교를 배경으로 그린 ‘세한도’(1973)는 결국 전통을 입은 현대였다. 특히 마음속 스승으로 삼았다던 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58세, 김종영 역시 같은 나이에 ‘세한도’를 그렸다는 건 우연 이상이다.

김종영의 ‘세한도’(1973). 추사 김정희의 동명작품을 모티브 삼아 종이에 펜과 먹, 수채로 그렸다. 58세의 추사가 제주도를 배경으로 삼은 ‘세한도’를 58세의 김종영이 삼선교를 배경으로 다시 살려냈다(사진=김종영미술관).


△구태여 깎지 않고…절제 지나쳐 무심한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것은 ‘연결고리 찾기’다. 글씨가 드로잉으로, 드로잉이 조각으로 전이되는 과정. 가령 가는 몇 줄의 선을 펜으로 그어 완성한 ‘드로잉’(1973)은 나무조각 ‘작품 73-1’(1973)로 이어진다. 굽이굽이 금강산 산세를 간결화해 먹·수채로 그린 또 다른 ‘드로잉’(1973)은 돌조각 ‘작품 74-6’(1974)을 낳았다. 이뿐인가. 서예 ‘유희삼매’(遊戱三昧·연도미상)를 확장한 수묵서화 ‘유희삼매’(1964)도 있다. 결국 이들의 접점은 김종영의 작품세계가 한순간 불현듯 떨어진 게 아니란 걸 보여준다. 특히 ‘유희삼매’는 기원을 추사의 서첩 ‘완당집고첩’에 두는데. 그 첫 장에 적힌 ‘유희삼매’를 예서로 옮겨내고, 서화로 살을 붙여낸 거다. 덕분에 이번 전시를 통해 세상에 처음 공개하는 ‘완당집고첩’까지 덩달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김종영의 서예작품 ‘유희삼매’(遊戱三昧·연도미상·위)와 이를 확장한 수묵서화 ‘유희삼매’(1964). 추사의 서첩 ‘완당집고첩’ 첫 장에 적힌 ‘유희삼매’를 예서로 옮겨내고, 서화로 살을 붙여냈다. ‘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 자재한 경지’란 본래의 뜻을 김종영은 “현실적인 이해를 떠나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유희적 태도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없이 예술은 진전을 볼 수 없다”고 해석했다(사진=김종영미술관).


여기에 한 가지 더. 김종영이 평생 붓과 정에 붙이고 다녔을 철학 ‘불각’(不刻)이다. 구태여 깎지 말라는 ‘불각의 미’는 글씨로 조각으로 곳곳에 스며 있다. 단번에 시선을 압도하는 작품은 삼선교 자택의 택호로 썼던 ‘불각재’(不刻齋·연도미상). 이후 이름조차 없어 후대가 연도별로 ‘작품 73-’ ‘작품 74-’ 등처럼 나열했던 조각은 하나같이 ‘나무는 나무답게’ ‘돌은 돌답게’ ‘철은 철답게’다. 야속하도록 군더더기를 빼고, 인색하도록 표현을 아낀 형체가 줄지어 나선다. 36년 전 타계한 인물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나무·돌·철의 무게감은 바닥에서 잡아당기는 뿌리 때문이었다. 절제가 지나쳐 참으로 무심한 깊이다.

구태여 깎지 말라는 김종영의 철학 ‘불각의 미’가 글씨로, 글씨가 드로잉으로, 드로잉이 조각으로 전이되는 과정은 ‘김종영, 붓으로 조각하다’ 전에서 눈여겨볼 지점. 굽이굽이 금강산 산세를 간결화해 먹·수채로 그린 또 다른 ‘드로잉’(1973·왼쪽)은 돌조각 ‘작품 74-6’(1974)으로 이어졌다(사진=김종영미술관).


△‘식화우난’ 홍라희 전 관장도 못 가진 글씨

이 고집스러운 강단에서 문득 떠올릴 만한 두 장면이 있다. 둘 다 삼성가와의 일화다. 작품을 거의 팔지 않았던 김종영의 작품 중 조각품 5점(공식확인된 것만)이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돼 있다. ‘작품 77-6’(돌), ‘78-15’(돌), ‘70-1’(나무), ‘작품 73-8’(돌), ‘작품 65-3’(나무). 그런데 이들이 리움으로 옮겨간 건 정식으로 사고판 과정을 거친 게 아니다. 삼성 측 제안에 고개를 젓던 작가의 고집을 꺾지 못하자 호암미술관이 대신 나서 ‘기증-사례’ 형식으로 거래를 성사시켰던 것. 1980년대 초반의 일이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비교적 최근인 2015년. 김종영 탄생 100주년에 맞춘 전시 ‘추사 김정희, 우성 김종영: 불계공졸과 불각의 시공’에서였다. 전시작 중 한 점을 사고 싶다는 의사를 유족 측에 전달한 이가 있었으니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전 관장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팔고 싶지 않다’. 이유는 ‘작가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였다. 홍 전 관장이 갖고 싶어 한 작품은 ‘식화우난’(識畵尤難)이란 서예작품. 그 내용은 이렇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렵지만 그림을 알아보는 것은 더욱 어렵다.”

김종영이 쓴 서예작품 ‘식화우난’(識畵尤難) 두 점 중 연도미상의 한 점. 130×33㎝의 종이에 ‘작화난이식화우난’(作畵難而識畵尤難)이라고 썼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렵지만 그림을 알아보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뜻이다.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전 관장이 사고 싶었다는 작품이다(사진=김종영미술관).


김종영이 쓴 ‘식화우난’은 두 점. 하나는 ‘세상에 그림 그리는 사람은 많으나 그림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다. 만약 그림 그리는 자가 그림 알아보는 식견까지 갖게 된다면, 그림수준이 반드시 성인의 경지에 이를 것’이란 내용까지 붙인 1971년 작품. 다른 하나는 이 중 앞부분만 발췌한 연도미상의 작품이다. 홍 전 관장이 눈여겨본 작품은 발췌본 ‘식화우난’이었다. 비록 작품은 못 얻었지만 홍 전 관장은 그림을 그리는 어려운 일을 알아본 ‘더 어려운 일을 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1971년의 ‘식화우난’과 연도미상의 ‘식화우난’ 두 점 모두 이번에 나왔다. 전시는 2월 4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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