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여기는 서울. 문화체육관광부가 ‘국립한국문학관’ 건립부지를 은평구 기자촌 근린공원으로 최종 결정·발표한 자리다. 국립한국문학관은 점점 유실·훼손되는 한국의 문학유산을 수집·보존하는 건 물론 전시·교육·체험기능까지 부여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정부와 문학계가 벼르던 사업이다.
지난주 오랜만에 문학계의 굵직한 이슈로 뉴스판이 뜨거웠다. 하나는 하루키로 더 친숙한 무라카미가 작가인생의 흔적을 기꺼이 내보일 ‘무라카미 라이브러리’를 만들겠다는 것. 다른 하나는 3년여를 끌어왔던, 말 많고 탈 많던 국립한국문학관의 터 선정이 이제야 합의에 이르렀다는 것.
그렇다면 국립한국문학관은?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국회의원 시절 발의해 2016년 2월 문학진흥법으로 제정한 뒤 지금껏 난항을 겪어온 이 기관의 설립에 애초부터 콘텐츠는 없었다. 첫째도 부지, 둘째도 부지, 셋째도 부지였으니까. 상징성·접근성·주변환경을 따지느라 3년여를 홀랑 날려버렸다. 전국 지자체가 다 덤벼드는 과열에 ‘추진 잠정 중단’이란 촌극까지 빚었던 터다. 거창한 프레임부터 내세우는 건 지극히 ‘한국스러운 병폐’라지만 그간 치고받아온 격론에 콘텐츠가 들었단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걸 의식했는지 이번 발표 끝엔 기증자료 몇몇을 꺼내긴 했다. 도서 3만 3000여점과 LP판 등 유물 100여점을 확보했다고. 사료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자랑거리는 못 될 듯한, 마음 한 줄 움직이기에 턱도 없는.
한 가지 더. 규모 말이다. 무라카미 라이브러리에 얼마를 들여 어떻게 꾸미겠단 얘기는 아예 빠졌다. 다만 “문학과 문화의 국제교류장이 됐으면 한다”는 무라카미의 바람은 적극 수용할 모양이다. 세계 수많은 ‘하루키 연구자’에게 도움이 되는 연구센터로 활용하겠다고 한 마디 보탰다. 국립한국문학관에는 608억원을 들이겠단다. 자료수집에 90억원, 건물 올리는 데 518억원. ‘국제교류가능성’을 언급하긴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는 부지선정을 위한 고려사항이었을 뿐. 세계 연구자가 들떠 찾을 어떤 매력포인트도 ‘아직은’ 없다.
‘격이 다르다’고 할지 모른다. 맞다. 격이 달라서 하는 소리다. 한쪽은 세금을 쏟아부어가며 번쩍거리게 지을 국립기관이고, 다른 한쪽은 대학 귀퉁이를 차지할 사립기관일 테니. 한국과 일본 사이에 든 격한 감정, 무라카미에 대한 선호도, 문학에 대한 기대감 등을 십분 반영하더라도 말이다. 둘 중 어디를 가볼 텐가 묻는다면 답은 뻔하지 않겠나. 힘 빼는 소리로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지만 어쩌겠나. 첫삽도 뜨기 전 이미 ‘졌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