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칼럼] '무라카미 라이브러리' vs '국립한국문학관'

  • 등록 2018-11-12 오전 12:12:03

    수정 2018-11-12 오전 12:12:03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여기는 도쿄. 일본 대표작가 무라카미 하루키(69)가 언론 앞에 섰다. 40여 년 집필활동을 하며 쌓아둔 원고와 장서 등을 모교인 와세다대에 기증하겠다고 발표하는 자리였다. 무라카미가 기자회견에 나선 건 37년 만이라고 했다. 신작발표 등 얘깃거리가 될 때마다 언제 촬영했는지도 모르는 사진 한 장을 모든 언론매체가 나눠 쓸 만큼 그는 ‘얼굴 없이’ 글만 썼다. 그러던 그가 모처럼 ‘신선한 표정’을 감춤 없이 드러냈다.

또 다른 여기는 서울. 문화체육관광부가 ‘국립한국문학관’ 건립부지를 은평구 기자촌 근린공원으로 최종 결정·발표한 자리다. 국립한국문학관은 점점 유실·훼손되는 한국의 문학유산을 수집·보존하는 건 물론 전시·교육·체험기능까지 부여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정부와 문학계가 벼르던 사업이다.

지난주 오랜만에 문학계의 굵직한 이슈로 뉴스판이 뜨거웠다. 하나는 하루키로 더 친숙한 무라카미가 작가인생의 흔적을 기꺼이 내보일 ‘무라카미 라이브러리’를 만들겠다는 것. 다른 하나는 3년여를 끌어왔던, 말 많고 탈 많던 국립한국문학관의 터 선정이 이제야 합의에 이르렀다는 것.

둘 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온도차가 같진 않다. ‘설렘’ 말이다. 무라카미의 기증품 중에 ‘노르웨이 숲’(1987)을 쓴 대학노트가 포함될 수 있단 소식이 벌써 팬심을 자극한단다. 국내외 그의 이름을 제대로 알린 그 소설이다. 작가에게서 자필원고나 편지 등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면 이건 어떤가. 데뷔 이전 재즈찻집을 운영하며 모은 음반 2만여장까지 내놓는다는데. 덕분에 무라카미주의자, 하루키스트를 자처하는 세계 열성팬들이 몰려들 걸 걱정해야 할 판이라는데.

그렇다면 국립한국문학관은?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국회의원 시절 발의해 2016년 2월 문학진흥법으로 제정한 뒤 지금껏 난항을 겪어온 이 기관의 설립에 애초부터 콘텐츠는 없었다. 첫째도 부지, 둘째도 부지, 셋째도 부지였으니까. 상징성·접근성·주변환경을 따지느라 3년여를 홀랑 날려버렸다. 전국 지자체가 다 덤벼드는 과열에 ‘추진 잠정 중단’이란 촌극까지 빚었던 터다. 거창한 프레임부터 내세우는 건 지극히 ‘한국스러운 병폐’라지만 그간 치고받아온 격론에 콘텐츠가 들었단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걸 의식했는지 이번 발표 끝엔 기증자료 몇몇을 꺼내긴 했다. 도서 3만 3000여점과 LP판 등 유물 100여점을 확보했다고. 사료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자랑거리는 못 될 듯한, 마음 한 줄 움직이기에 턱도 없는.

한 가지 더. 규모 말이다. 무라카미 라이브러리에 얼마를 들여 어떻게 꾸미겠단 얘기는 아예 빠졌다. 다만 “문학과 문화의 국제교류장이 됐으면 한다”는 무라카미의 바람은 적극 수용할 모양이다. 세계 수많은 ‘하루키 연구자’에게 도움이 되는 연구센터로 활용하겠다고 한 마디 보탰다. 국립한국문학관에는 608억원을 들이겠단다. 자료수집에 90억원, 건물 올리는 데 518억원. ‘국제교류가능성’을 언급하긴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는 부지선정을 위한 고려사항이었을 뿐. 세계 연구자가 들떠 찾을 어떤 매력포인트도 ‘아직은’ 없다.

무라카미 라이브러리는 당장 내년부터 순차적으로 진행할 거란다. 지금도 계속 쓰는 작가니 내놓을 수 있는 것부터 옮겨내겠단 거다. 이미 늦었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국립한국문학관은 2022년 하반기나 돼야 그 위용을 볼 수 있을 거란다. 어쩐지 4년 뒤에나 있을 개관식은 보지 않아도 본 듯도 하고.

‘격이 다르다’고 할지 모른다. 맞다. 격이 달라서 하는 소리다. 한쪽은 세금을 쏟아부어가며 번쩍거리게 지을 국립기관이고, 다른 한쪽은 대학 귀퉁이를 차지할 사립기관일 테니. 한국과 일본 사이에 든 격한 감정, 무라카미에 대한 선호도, 문학에 대한 기대감 등을 십분 반영하더라도 말이다. 둘 중 어디를 가볼 텐가 묻는다면 답은 뻔하지 않겠나. 힘 빼는 소리로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지만 어쩌겠나. 첫삽도 뜨기 전 이미 ‘졌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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