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브랜드’ 덫에 빠진 식품업계···대형마트 하청공장 전락

유통 대기업 PB 제품 강화하며 제조사 입지 줄어
제조에 유통까지 수직계열화···중견 식품기업까지 PB제품 생산
매대 결정권 쥐고 제조사 쥐락펴락···“유통사 요구 거절 어려워”
  • 등록 2017-06-09 오전 5:30:00

    수정 2017-06-09 오전 7:31:04

서울 여의도 이마트의 우유 매대. 골든존에 이마트의 PB 제품인 ‘굿 밀크’와 ‘진심을 담은 우유’가 진열돼 있고, PB 제품을 제조하는 매일유업의 ‘매일우유’와 ‘소화가 잘되는 우유’ 등이 위 아래로 진열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데일리 최은영 기자]이마트(139480)의 ‘진심을 담은 우유’는 매일유업(267980)이 만든다. ‘짬뽕라면’·‘짜장라면’은 삼양식품(003230)이, ‘라면 한그릇’은 팔도가 생산한다. ‘한입 비엔나’와 ‘초코파이’는 신세계와 유통 라이벌인 롯데 식품 계열사 롯데푸드(002270)롯데제과(004990)가 각각 제조해 이마트에 납품하고 있다. 이 제품들은 모두 이마트 독자 브랜드 상품이다.

식품업계가 유통 대기업 PB(Private Brand) 상품의 덫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제조사와 유통사의 구분이 뚜렷했던 시절에는 ‘동지’였던 관계가 유통사가 제조까지 직접 도맡으며 ‘경쟁자’로 바뀌더니 유통사가 PB 확장에 속도를 내면서는 ‘상하’ 관계로 재편되는 모양새다.

현재 유통사 PB 제품을 생산하지 않는 업체는 CJ제일제당(097950)농심(004370), 서울우유협동조합, 오리온(001800) 등 라면과 우유 등 특정 분야에서 1등 브랜드를 보유한 식품기업 정도다. 일각에선 제조사가 유통 대기업의 생산공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극단적으로 ‘제조업의 붕괴’를 경고하는 목소리도 있다.

일반적으로 PB 제품은 마케팅과 유통비용이 절약돼 제조사 고유 상품인 NB(National Brand) 제품보다 가격이 10~20% 가량 저렴한 것이 특징이다. 생산-유통 단계를 간소화해 가격을 낮추고 중간 마진의 일부를 유통업체가 챙기는 구조이다 보니 유통사는 PB 제품을 팔면 일반 제품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다. 안정적인 생산 규모를 확보해 공장 가동률을 높일 수 있다는 측면에선 제조사에 이득이 되기도 있다. 얼핏 보면 제조사-유통사-소비자 모두에게 득이 되는 것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식품업계 한 관계자는 “처음에는 상생 관계로 시작했던 것이 유통사가 욕심을 내며 종속 관계로 바뀌기 시작했다”면서 “‘초코파이’, ‘카스타드’ 등 소비자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식품업계 주력 제품까지 유통사가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 문제다. 그렇다고 유통사가 제조를 맡아달라고 하는데 기존 제품의 판매 등을 고려하면 거부하기도 어렵다. 식품업체 매출 40~50% 가량이 대형마트에서 나온다.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유통사의 요구에 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마트 PB 라면 제품들.
실제 이마트 전용상품 ‘라면이라면’은 ‘진라면’·‘참깨라면’으로 유명한 오뚜기(007310)가 생산하는데, 이 제품을 맛본 한 소비자는 자신의 블로그에 “계란블록까지 그대로. ‘참깨라면’에 참깨만 안 들어간 맛”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유통업체가 자사 PB 제품을 ‘골든존’에 진열하고 마치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하듯 PB 제조사에서 만든 NB 제품을 목 좋은 곳에 진열해 의도적으로 소비자들의 선택을 유도하는 행태도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골든존은 매장 혹은 매대에서 매출이 가장 잘 나오는 진열대를 말한다. 이마트 PB 우유를 골든존에 깔고, PB 우유를 생산하는 식품업체 매일유업의 NB 제품을 고객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하는 식이다.

식품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PB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라면서도 “소비자 입장에서도 PB 제품은 경제적으로 이득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아닐 수도 있다. PB 제품 대부분은 ‘가격’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유통업체의 요구에 따라 제조사가 무리하게 제품 단가를 낮추다 보면 제품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업계 발전에 독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제조업의 생태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유통사가 PB 제품으로 이득을 취하기 위해선 중소기업과의 협업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유통사의 PB 협업 상대로는 제조하는 상품이 겹칠 우려가 있는 메이저 제조사보다는 판로를 뚫기 어려운 중소기업이 ‘상생’ 파트너로 더 적합하다는 이야기다.

이마트도 노브랜드를 중소기업 발굴 및 육성 플랫폼으로 키워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중소기업진흥공단과 업무 협약을 맺고 노브랜드의 중소기업 생산 비중을 지난해 60% 수준에서 올해 말까지 7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이마트는 노브랜드 확장의 당위성으로 ‘상생’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과장된 측면이 적지 않다.

이마트에 따르면 지난해 노브랜드 제품을 생산한 중소기업 수는 모두 123개로, 이들은 노브랜드 제품 생산으로 768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해 노브랜드는 출시 1년 여 만에 제품수를 1000여 개로 늘리고, 매출 1900억 원을 기록했는데 매출 기준으로는 중소기업 제품 비중이 40% 수준에 불과하다. 나머지 매출 60%는 수입이거나 이마트 계열사인 신세계푸드(031440), 중견 식품업체 제품 판매에서 나왔다.

노브랜드는 전문 매장 출점을 둘러싸고도 한국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와 갈등을 빚고 있다. 건전지와 물티슈, 감자칩 등 동네 슈퍼와 주력 상품군이 겹치는 상황에서 노브랜드 매장을 확장하는 것은 골목상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수퍼마켓조합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편, 국내 대형마트 1위 이마트는 현재 패션 브랜드 ‘데이즈’, 가정간편식 브랜드 ‘피코크’, 실속형 브랜드 ‘노브랜드’를 필두로 생활용품 브랜드 ‘리빙홈’, 반려동물 브랜드 ‘몰리스’까지 모두 12개의 PB를 운영 중이다. 지난해 총 매출 13조5642억원 가운데 PB 제품 판매 비중은 약 2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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