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 조각가는 오늘도 쫀다…"돌의 운명이라"

'돌조각 거목' 전뢰진 70년 조각인생 회고
선화랑서 제자20명과 '조각일로 사제동행'
10평 신림동 작업실서 여전히 매일 작업
정·망치로 농사짓듯 돌만 바라보고 쪼아
"돌도 운명…형태 바뀌면 그게 운명이지"
  • 등록 2018-10-01 오전 12:12:00

    수정 2018-10-01 오전 12:39:34

“운명대로 살아야지. 거역해도 안 되고 쫓아다녀서도 안 되고. 운을 잘 활용해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조각가 전뢰진의 대표작 ‘사랑’(1982·대리석) 틈새로 구순을 맞은 작가 전뢰진이 보인다. 평생 어머니와 아이, 가족·동물 등 순박한 인생을 조각하며 돌과의 인연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항아리장수가 길을 가다가 항아리를 깨뜨렸어. 그런데 그냥 가. 왜냐고? 돌아본다고 다시 붙나. 버려야 새것이 나오지. 그것이 운명이야. 돌도 운명이야. 형태가 바뀌면 그것이 돌의 운명이지.”

돌의 운명이라. 그래, 어느 돌은 사람의 무심한 발끝에 채이고, 어느 돌은 뭉개지고 으깨져 형체를 잃어간다. 그리고 어느 돌은, 용케 그이의 품에 들었다. 그러니 기꺼이 제 운명의 값은 치러낸다. 망치로 맞고 정에 쪼이는 아픔을 감수하고 대신 영혼을 얻는 거다. 석상이 되는 거다.

현란한 치장은 말자. 돌은 화려해도 돌인 거다. 망치 맞고 정에 쪼인 돌덩이가 극한의 화려함인 거다. 돌이 그랬듯 조각가의 인생도 그랬다. 인생의 망치와 정에 맞을 만큼 맞고, 돌을 닮아간다. 석화한 삶이다. “요즘도 매일 작업해. 안 하면 궁금하고, 뭔가 남긴 거 같아 불편하고.” 그렇게 70여년. 돌은 조각가에게, 조각가는 돌에게 최선을 다했다. 어느 시대 석공과 돌의 관계가 이리 애틋했을까.

조각가 전뢰진이 서울 종로구 선화랑에 연 구순 기념 특별기획초대전 ‘조각일로 사제동행’을 위해 모처럼 외출을 했다. 왼쪽으로 ‘모자상’(2016·대리석)이, 오른쪽으로 ‘여인입상’(2002·대리석)이 보인다. 뒷 배경은 작가의 신림동 지하작업실을 재현한 것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신림동 지하작업실서 나온 순박한 인생들

1929년생이니 내년이면 구순이다. 그 나이까지 사는 사람이 드물어 예부터 별칭조차 없었다. 아니 ‘졸수’(卒壽·생명을 끝내다)란 민망한 호칭을 들이대기도 했다. 그런데 민망한 건 우리다. 아직도 맨손으로 돌 앞에 나서는 그이 앞에서 나이나 따지고 있으니.

조각가 전뢰진(89·홍익대 명예교수·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은 오늘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열 평 남짓한 어두컴컴한 지하작업실에서 홀로 돌을 쫀다. 작업실 조명은 늘 백열등. 백열등 아래서 정 터치가 가장 잘 보이기 때문이란다. 처음에는 이조차도 못 돼 두 평짜리 연탄창고에서 시작했다니. 통풍도 안 돼 첩첩이 쌓인 돌먼지를 평생 들이마신 그이를 두고 누구는 아흔까지 살아낸 게 용하다고도 말한다.

전뢰진의 ‘우주여행’(1969·대리석). 1969년 아폴로 11호가 인류의 꿈이던 달 착륙에 성공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제작한 작품이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전뢰진의 ‘모자(합주)’(1962·대리석). 길이가 채 50㎝가 안 되는, 모나지 않고 푸근한 작품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대작을 하라는 주위에 권유에 “그건 욕심”이라며 일축했다고 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노작가가 외출을 했다. 그이의 돌덩이도 같이 나섰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에 연 구순 기념 특별기획초대전 ‘조각일로 사제동행’(10일까지)을 위해서다. 사제동행에 나선 제자들은 국내서 내로라하는 조각가 20명. 1963년부터 1994년까지 전 작가가 홍익대에서 길러낸 후학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 가지 더 있다. 조각가 전뢰진을 참스승으로 여기는 제자란 것. 팔순·칠순의 그들이 앞장서 꾸민 자리는 스승을 향한 정갈한 마음이 여전하다. 이번 기회에 만들었다는 ‘전뢰진기념사업회’ 초대회장이 여든 살의 김수현(충북대 명예교수)이고, 부회장이 일흔한 살의 고정수(조선대 전 교수)라니.

전시에는 전 작가의 대표작 15점이 나섰다. ‘모자(합주)’(1962), ‘사랑’(1982), ‘엄마와 아가’(1985), ‘풍요’(1986), ‘소녀의 꿈’(1991) 등 연륜이 꽤 된 작품에 ‘두상’(2010), ‘화합’(2015), ‘모자상’(2016), ‘소녀상’(2016), ‘화애’(2018) 등 최근작이 나서 조화를 이룬다. 이중 ‘화애’(2018)는 미완성이다. 어머니와 아이, 그 옆의 강아지가 어슴푸레한 윤곽으로 뭉쳐 있다. 전시 후 작업실로 돌아가 완성을 본 뒤 이달 예정된 ‘대한민국예술원 미술전’에 다시 나설 거란다.

조각가 전뢰진의 재미있는 철학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다. 돌을 쪼다 보면 모난 부분은 무조건 망치를 맞게 돼 있다는 거다. 그러니 잘난 체하지 말라는 거라. 겸손하라는 거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평생 500여점을 조각했다는데 정작 작가 자신이 품고 있는 작품은 몇 점 없다. 그 빈자리는 제자 20명이 채웠다. 강관욱·고경숙·고정수·권치규·김경옥·김성복·김수현·김영원·김창곤·노용래·박옥순·박헌열·이일호·이종애·전덕제·전소희·전용환·정현·한진섭·황순례 등이 스승의 것을 닮은 작품 한두 점씩을 내놔 사제동행의 의미를 다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각의 바탕이 되는 드로잉 작품도 같이 걸렸는데. 역시 압권은 ‘전뢰진 돌조각’의 태동이라 할 미공개 드로잉 100여점이다.

“조각하길 잘했어. 난 운이 좋아.” 전시장에서 만난 전 작가가 잠시 회상에 잠겼다가 불현듯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뭘 꺼내놓는다. 낡은 수첩과 귀퉁이가 닳아빠진 손바닥만한 켄트지 몇 장. 조각을 하려면 모델링이 필요하다. 일종의 기획안인 셈인데 전 작가는 켄트지 드로잉으로 그것을 대신한단다. 언제 어디서든 뭔가 떠오르면 꺼내놓고 그리는 게 오랜 습관이다. 그중 엄선한 100여점이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전뢰진의 드로잉 ‘날고 싶다’(1989). 손마닥만한 켄트지 몇 장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뭔가 떠오를 때마다 꺼내놓고 그리는 게 작가의 오랜 습관이다. ‘전뢰진 돌조각’은 여기서 태동했다. 날짜와 서명을 넣어 완결성을 갖춘 미공개 드로잉 100여점이 구순 기념 특별전 ‘조각일로 사제동행’에 걸렸다(사진=산화랑).


△농사짓듯…오로지 정과 망치로 70여년

순하고 푸근하다.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하다. 주제는 또 어떤가. 어머니와 아이, 가족, 여성, 동물이라니, 그이의 작품 앞에선 누구든 무장해제를 당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석조조각 창시자’ ‘한국조각계 거목’ 등으로 평가받지만 대중적으론 덜 알려진 셈. 자살률을 뚝 떨어뜨렸다는 부산 태종대의 ‘모자상’(1976),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로열로비에 ‘십장생부조’(1977), 강남구 테헤란로 개통 기념탑(1977), 남산 3호터널 개통 ‘독수리 기념탑’(1978), 명동 외환은행 본점에 ‘낙원가족’(1980) 등이 그나마 유명하다. 유일한 브론즈 작업도 있다.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의 ‘김대건 신부 동상’.

왜 굳이 돌이어야 했나. “다 해봤어. 다른 건 돌 같이 안 돼. 돌은 하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남이 안 해 더 좋았지.” 그렇다면 왜 하필 대리석인가. “화강암도 써봤어. 시간이 많이 걸려. 대리석이 좋아. 돌이 연해 내 맘대로 쫄 수 있고.” 그 대리석은 굳이 전북 익산에서 난 것을 고집한다. 열아홉 살부터란다. “우연히 돌 캐던 사람을 알게 됐는데. 그 노인도 떠나고, 그 아들도 떠나고.” 그러다가 특유의 선한 미소를 짓는다. 지금도 익산의 한 공장에서 대리석을 조달하는데 그것이 정말 익산 것인지는 알 수 없다며.

전뢰진의 ‘두상’(2010·대리석 ‘적사암’)과 ‘소녀상’(2016·대리석). 최근작이다. 단출했던 구상이 점점 더 단출해지는 중이다. 작품들 뒤쪽 벽면으로 켄트지에 그린 작가의 드로잉작품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전뢰진 ‘소녀상’(2016·드로잉)의 뒷부분. 앞면의 소녀상이 뒷면에선 나이가 지긋한 여인상으로 바뀌어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조각가라기보다 이제 막 밭일을 마친 농부의 얼굴. 석조는 농사짓듯 해야 한다더니, 그새 닮아버렸나. 포기하지 않고 길게 봐야 하는 일이다. 조금씩 손을 보태다 보면 어느 날 완성작이 우뚝 서 있다. 서로 존중하며 오랜 시간 반복해야 형태가 나오는 정직한 작업. 그 덕일 거다. 전 작가의 작품 중에 삐죽한 대작보다 있는 듯 없는 듯 일상에 스민 게 많은 건. 돌 자르는 기계 하나 없이 오로지 정과 망치만으로 나서는 데야 요란한 게 나올 수가 없는 거다.

남기고 싶은 작품이 더 있을까. “글쎄. 오래 살아야지. 팔리지도 않는 거 자꾸 만들어야 재료 살 돈도 안 생기고. 다들 좋아하는 작품을 해야지. 그래도 돌은 많았으면 좋겠어. 돈이 생겨야 돌을 살 텐데.”

지난 여름 맹렬했던 무더위를 조각가 전뢰진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 열 평 남짓한 지하작업실에서 돌을 쪼며 이겨냈다. 작업 중인 작품은 구순 기념 특별전 ‘조각일로 사제동행’에 나온 ‘화애’(2018·대리석). 유일하게 미완으로 나온 작품이다(사진=선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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