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고 한다. 누적 관객이 280만8301명(지난 10일 기준)이다. 21년 전 트라우마는 어떤 울림을 줬던 것일까.
기자는 2시간의 러닝타임 직후 딱 두 장면이 떠올랐다. 소기업 사장 갑수(허준호 분)에게 한 공장 직원이 고민 끝에 내뱉는 말이 첫번째 장면이다. “사장님, 월급이 밀렸는데요.” 그래도 그 직원은 “사장님만 믿는다”며 불평도 않은 채 웃는다. 또 하나. 부도 위기에 몰린 갑수가 컴컴한 부엌에서 홀로 소주를 들이붓다 극단적인 선택을 각오하는 장면이다. 갑수는 아이들 방에 붙여진 이름을 보며 꺼이꺼이 운다.
하지만 동시에 탐욕도 넘실대는 게 금융 판이다. 영화 속 윤정학(유아인 분)이 일했던 고려종금이 그 상징이다. 1997년 말 국내에 종금사가 30개에 달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6개였는데, 자본시장 개방과 함께 불과 몇 년 사이 확 늘었다. 종금사는 국제 금융에 미숙했지만 겁이 없었다. 정부의 규제·감독도 없이 단기 해외자금을 차입해 국내 대기업에 빌려주는 ‘돈 장사’에 혈안이 됐다. 그 결말은 어땠나. 한국은행 팀원 이대환(조한철 분)은 당황하며 “대우가 위험하다”고 읊조린다. 대우가 파산하며 남긴 빚이 70조원이다. 이후 이어진 금융기관 부실과 중소기업 줄도산. 소시민의 삶이 파탄 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영화는 시종일관 고위 당국자들의 협상을 쫓는다. 국제통화기금(IMF)과 협상이 잘못됐다는 게 주제로 보일 정도다. 하지만 보는 내내 불편하다. 당시 실무협상에 임했던 전·현직 당국 인사들의 말이다. “다른 건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무슨 수를 써서든 달러를 구해야 했습니다.”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과 한은 팀장 한시현(김혜수 분)의 선악(善惡) 구도는 위기의 본질을 흐린다.
금융위기 권위자 찰스 킨들버거(1910~2003)는 “악마는 맨 뒤에 처진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했다. 위기의 결말이 비극인 것은 거창한 그 무엇 때문이 아니다. 그저 갑수와 그 직원들의 일상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요즘 당국 인사들도 한 번쯤 곱씹어볼 만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