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국가원수 모독죄, 그 어두운 기억

  • 등록 2019-03-15 오전 6:00:00

    수정 2019-03-15 오전 6:00:00

국가원수 모독죄가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한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국회연설이 발단이다.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대목에서 여당 의원들이 발끈하고 나섰다. 북한 정권을 대변한다는 표현으로 국가원수인 문 대통령을 헐뜯었다는 것이다. 이날 연설에서 열거된 좌파·반미·종북 등의 용어도 여당 의원들을 자극했을 법하다. 결국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한국당이 서로 윤리위에 제소하는 등 마찰이 확대되는 분위기다.

북핵 문제와 대미 외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야 간의 마찰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다. ‘완전 비핵화’를 목표로 시작된 핵폐기 협상이 마냥 겉돌고 있는데도 문 대통령이 금강산관광 재개와 개성공단 재가동을 추진하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게 자유한국당의 인식이다. 반면 청와대와 정부·여당은 핵폐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도 부분적인 제재 해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여야 정치권이 상생과 타협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겉돌고 있다는 증거다. 소득주도성장 정책과 탈원전, 4대강 보 철거 등에서 보듯 대립은 첨예하다. 여기에 선거제도 개혁까지 겹쳐 서로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다는 기싸움이 팽팽한 상황이다. 이러한 마찰이 국회 연설로 파열됨으로써 국가원수 모독죄 논쟁까지 번지게 된 셈이다.

긴급조치 시절 국가원수 모독죄의 위력은 대단했다. 정확히는 ‘국가모독죄’라는 조항으로,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처벌하도록 돼있었다. 독재체제 비판에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에서 도입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고교 교사였던 양성우 시인이 시국을 비판하는 ‘노예수첩’ 장편시를 일본 잡지에 게재했다는 이유로 투옥된 필화사건에서도 그 위력을 짐작하게 된다. 시절이 암울하다고 해서 ‘노예’라는 문학적 표현조차 용납하지 않은 것이었다. 심지어 김옥선 의원이 의정 단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히틀러·스탈린·무솔리니와 같은 독재자에 비유했다가 제명 위기에 몰린 나머지 자진사퇴로 금배지를 반납한 사례도 없지 않다.

국가모독죄가 형법에서 폐지된 것은 1988년의 일이다. 유신시대가 끝나고 전두환 체제에 이어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야 그 근거가 퇴출됐다. ‘6월 항쟁’ 이후 구성된 제13대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이 규정이 우선적으로 삭제됐으니, 민주화의 가장 큰 결실이라 부를 만도 했다.

이 조항은 법전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위헌이라는 불명예까지 껴안고 말았다. “형사처벌로 표현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게 헌법재판소가 2015년 재판관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린 이유다. 자유로운 비판과 참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원수 모독죄는 사라졌건만 국가원수에 대한 폄훼가 여전한 것이 우리 정치의 불행한 현실이다. 과거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쥐박이’, ‘2MB’라는 비하 표현이 거침없이 사용됐으며, 박근혜 대통령은 ‘귀태’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그 전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도 “입을 공업용 미싱으로 박아야 한다”거나 “놈현스럽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정권을 바꿔가며 서로 상대방 대통령에게 욕설을 퍼부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집권 세력이 상대편을 끌어안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서 포용의 정치가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정치적인 비난의 표현을 법적으로 다스리겠다는 발상은 옳지 않다. 더구나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로 무덤에 파묻힌 규정까지 다시 들먹이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어떠한 비방이나 허위 선전도 마지막 판단은 국민이 내리기 마련이다.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린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래도 국가원수 모독죄로 처벌해야 한다면 문제의 표현을 처음 사용한 블룸버그통신부터 피고석에 세워야 할 것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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