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어깨 맞대고 걷는 골목길서 ‘천년 도시’의 향수를 느끼다

전남 나주 골목길 기행
복합문화공간으로 바뀐 나주의 옛 가옥들
나주향교에서 금성관까지 걷는 '고샅길'
왕이 사용한 지방궁궐이자 객사인 '금성관'
  • 등록 2019-08-16 오전 5:00:00

    수정 2019-08-16 오전 5:00:00

전남 나주 목서원 앞 마당 그늘에서 한여름 더위를 피하고 있는 관광객과 강아지들


[나주= 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전남 나주의 다른 이름은 ‘소경’(小京)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표현으로 ‘작은 서울’이라는 뜻이다. 나주가 딱 그렇게 생겼다. 금성산을 뒤로 두른 채 영산강이 앞에 흐르고 있다. 또 나주천이 시내를 관통하고 남산이 있다. 서울로 빗대면 한강과 청계천, 그리고 남산이다. 도시로서의 역사도 천 년을 헤아린다. 후삼국 때 왕건이 나주를 차지하면서 호남의 맹주 견훤이 쇠퇴했고, 왕건은 고려를 세운 뒤 ‘나주’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내렸다. 전라도(全羅道)라는 이름 또한 나주에서 비롯됐다. 목이 들어섰던 호남의 두 고을 전주와 나주를 합친 말이 ‘전라도’다. 화려했던 호남 최고의 도시, 나주의 흔적을 찾아 나주읍성을 따라 걸었다.

동학농민혁명을 막아낸 공로로 해남 군수에 제수된 정석진의 제당으로 지어진 ‘난파정’. 정석진의 아들 정우진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1915년에 지은 건물이다.


◇난초향 가득한 언덕에 자리한 그림같은 한옥

난파정 툇마루에 앉아 있으면 한여름 더위도 금새 식는다
나주의 진산, 금성산. 450m 낮은 산이지만, 낮다고 얕봐선 곤란하다. 고려 때 전국 7대 명산으로 꼽혔고, 조선 때에도 11대 명산으로 꼽힌 산이다. 까닭이 있다. 금성산은 이른바 기가 가장 센 산이다. 전국의 영산중에서 신당을 5개나 둔 산은 금성산이 유일하다. 그래서인지 나주는 예부터 무당이 많고 또 용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지금도 나주 시내에는 수백 년 묵었다는 신당나무가 곳곳에 서 있고, 당집도 유독 눈에 자주 띈다.

이 금성산 끄트머리에 ‘난파정’(蘭坡亭)이 자리하고 있다. 난파는 ‘난이 가득 피어있는 가파른 언덕’을 의미한다. 동학농민혁명을 막아낸 공로로 해남군수에 제수된 정석진의 호다. 난파정은 본래 제당으로 지어졌다. 정석진은 1894년 동학농민군으로부터 나주읍성을 지켜낸 공로로 해남 군수로 제수받은 인물이다. 이듬해 단발령에 반발해 지역 향리들과 을미의병을 일으켰다가 전라우수영에서 참수당했다. 난파정은 정석진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아들인 정우진이 1915년에 지은 건물이다.

난파정 툇마루에 앉아 한여름 열기를 피하고 있는 관광객


난파정 아래에는 난파고택이 있다. 정석진의 아들인 정우진이 살았던 집터다. 그의 손자인 정덕중이 1939년에 어머니를 위해 다시 집을 지으면서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 전남 유일한 건축가였던 박영만이 설계하고, 대목장인 김영창이 시공했다. 난파고택은 건축학적 가치도 크다. 구들장 난방을 하는 한옥을 기반으로, 지붕과 창문은 일본식, 왼쪽 사랑채의 삼각창과 육각창은 서양식을 접목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다.

목서원 앞 마당 그늘에서 한여름 더위를 피하고 있는 관광객과 강아지들


해방 이후 버려지다시피 한 난파정과 난파고택을 전주 출신의 사업가 남우진 씨가 사들여 숙박·공연·전시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몄다. 난파정과 난파고택은 숙박공간으로 쌀창고는 카페로 개조했다. 단순히 개조를 넘어 고택과 정원, 창고까지 옛 건축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한 노력이 곳곳에 보인다. 목서원이라는 이름은 난파고택 마당의 금목서와 은목서 나무 이름에서 따왔다. 카페로 변신한 쌀창고는 ‘39-17 마중’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1939년의 정서를 2017년이 마중 나가 되살렸다는 의미다. 목서원은 매력적인 공간으로 가득하다. 옛 나주의 한 가운데에 홀연히 떨어진 듯하다. 시간이 현재와 과거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기분이다.

버려지다시피한 난파정과 난파고택을 사들여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시킨 남우진 대표
임진왜란으로 소실한 성균관 대성전을 다시 지을 때 본보기로 삼았다는 나주향교 대성전


◇어깨가 닿을 만큼 좁은 골목길을 걷다

목서원에서 나와 나주목 관아의 객사인 금성관까지 이르는 길은 나주읍성 걷기 길인 ‘나주고샅길’이다. 고샅은 시골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뜻한다. 원래는 ‘연애고샅길’이었다. 두 명이 나란히 걸으면 어깨가 닿을 만큼 좁아 남녀가 이 고샅에 들어서면 연애를 한다고 해 생긴 이름이다.

목서원 담장 너머가 나주향교다. 나주는 호남의 유교를 대표하는 도시였다. 그 증거가 나주향교다. 규모나 격식을 따졌을 때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향교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한 성균관 대성전을 다시 지을 때 나주향교의 대성전을 본보기로 삼았을 정도다. 나주향교는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강학당인 명륜당과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인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은 옛모습 그대로다. 다만,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은 최근 복원했다. 대성전 앞 은행나무와 명륜당 비자나무는 500년 기품을 은은하게 풍긴다. 여기에 유생들이 공부하던 장소인 사마재(司馬齋)까지 더하면 일대가 고즈넉한 한옥 마을과 다름없다. 향교 입구에는 여러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그중에 성종3년(1472년) 문과에 급제한 박성건의 ’금성별곡‘을 새긴 비는 나주의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금성별곡은 그의 제자 10명이 한꺼번에 소과에 합격한 기쁨을 노래한 경기체가다.

갓끈을 고쳐맨다는 뜻의 외삼문인 ‘정수루’


나주향교에서 내려오면 외삼문인 망하루(望華樓)와 정수루(正綏樓)다. 객사나 동헌 앞 누대는 공공행사를 치르거나 국가 정책을 선포하는 용도였다. 보통 작은 고을에는 1개, 큰 고을에는 2개를 세웠다. 나주가 그만큼 큰 마을이었다는 것이다. 망화루는 ‘서울을 바라본다’, 정수루는 ‘갓끈을 단정하게 고쳐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임금을 대신해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되새기는 이름이다. 정수루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 나주목사의 내아(안채)인 금학헌이 자리하고 있다. ’비파(琴)와 학(鶴)‘ 역시 관리의 청렴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1980년대 후반까지 실제 나주군수가 숙소로 사용했다. 지금은 고택 민박으로 활용하고 있다.

나주관아의 객사인 ‘금성관’


◇나주읍성의 중심 ‘금성관’

나주읍성의 중심은 금성관(錦城館)이다. 왕이 사용하는 지방궁궐이자 객사였다. 전국에서 가장 컸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한양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렸다. 경복궁처럼 금성관에 가려면 삼문을 거쳐야 한다. 중삼문과 외삼문을 갖춰 궁궐 같은 짜임새다. 내삼문은 현재 터만 남았다. 복원한 외삼문에서 금성관으로 한 걸음씩 옮기면 흡사 경복궁 근정전으로 들어서는 느낌을 받는다. ‘작은 한양’이라는 자부심이 괜한 허세가 아니다. 이유인 목사(1487~1489년 재임)가 지은 금성관은 중수와 개수를 거쳐 1976년 전면 해체 복원해 지금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복원한 문화재는 당시의 기술 수준과 예술적 안목을 반영한다. 금성관 바로 앞에 서면 언뜻 사찰의 대웅전과 흡사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도 뒤뜰의 두 그루 은행나무의 자태는 여전하고, 최근엔 객사 동편에 연못자리를 복원해 격식을 갖춰가고 있다.

1807년 7월 설립한 구 금남금융조합 건물. 해방 이후 나신면사무소와 나주읍사무소로 이용했다.


나주읍성의 동문 동점문 밖에는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돌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석장(石檣)’ 혹은 ‘동문 밖 석당간’으로 부르는데, 나주읍성을 쌓은 후 오래도록 번성하라는 보완 장치로 보고 있다. 나주의 지형이 선박과 비슷해 돛대로 세웠다는 설도 있다. 순풍에 돛을 단 듯 나주가 번성하길 바라는 뜻은 같다. ‘동국여지승람’에 석장과 목장이 쌍을 이루고 있었다는 기록에 따라 최근 동문 바로 옆에 목당간도 복원해 놓았다.

금성관 뒤편은 사창(司倉)거리다. 줄다리기 줄을 꼬는 데 사용한 커다란 느티나무 뒤로 담장을 마주한 좁은 골목이 이어진다. 이곳에는 약 500년 전부터 정부의 양곡 창고가 있었다. 읍성 한가운데 폐허로 남아 있는 ‘나주정미소’는 최근까지도 정부 양곡창고로 쓰였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세운 나주정미소는 건물 하나가 아니라 블록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다. 속살이 드러나는 기와지붕 관리사무소와 일제강점기에 지은 여러 채의 창고 건물이 재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나주 빛가람전망대에서 바라본 나주 시내


◇여행팁= 목서원에서는 ‘오랜 길목에서 마주친 특별한 시간, 별안간 나주’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문체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프로그램 중 하나다.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은 2016년 전국 10개 권역(총 39개 지지자체)을 선정해 각 권역의 관광콘텐츠 확충 등을 지원하고 있다. 목서원에서는 ‘숙박+체험+투어+공연’을 한 곳에서 경험할 수 있다. 한옥이 주는 아름다움 외에도 나주고샅투어(나주 옛길)나 청년들이 소개하는 나주향토음식 별미식탁과 공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나주 출신의 청년 셰프가 만들어주는 나주 별미음식과 청년 연주자가 들려주는 음악은 그들의 정성과 애정을 담고 있어 더욱 맛있고 감동적이다. 당일 여행 시 공연과 체험, 식사비는 3만 5000원이다. 숙박비는 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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