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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남편의 한마디에 오래도록 아내를 괴롭히던 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양화를 전공한 아내가 첫 개인전(1973년 명동화랑) 뒤 쏟아지던 ‘전혀 동양화 같지 않다’던 세간의 눈초리로 속앓이를 하던 터였다.
“동양화, 서양화가 어디 있나. 그저 민자, 너의 그림을 그리는 거야. 너만의 그림. 예술보다 인생이 더 소중한 거지.” 남편의 입장은 확고했다. ‘영글고 참된 인생이 가득하면 그림도 그 속에서 스스로 익어갈 텐데’ 형식 따위가 무슨 상관이냐고.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다. 요즘과는 달랐다. 격식이나 원칙이니, 이런 딱딱한 규율이 화면을 차지하던 때였다. 그런 시절에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위로와 격려라니, 그것도 하늘같이 의지하던 남편의 것이라니 오죽 든든했을까.
위로와 격려뿐이겠는가. 남편의 말은 ‘모범답안’이기도 했다. 서양의 물감으로 옮겨놓는 동양의 정신. 오방색으로 단아하게 뽑아낸 색감이며, ‘정토와 피안’ ‘순환과 만다라’를 오가는 테마는 아무나 들여다볼 수 없는 저 너머 세상까지 꿰뚫게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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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화가 하인두(1930∼1989)와 류민자(77)가 30년 세월을 사이에 두고 재회했다. 무심하게 먼저 떠난 하 화백의 빈자리를 지켜오던 아내 류 화백이 모처럼 연 개인전에 남편의 흔적을 가져다 놓은 거다. 이름 하여 ‘하인두 30주기 기념 류민자’ 전이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펼친 그 공간에는 하 화백의 7점, 류 화백의 30여점 등 다른 듯 닮은 회화작품 40여점이 그들만의 대화로 그때 그 시절을 회고한다.
△전통색 단청·불교철학…다른 듯 닮은 예술혼
하 화백은 한국추상화 1세대로 꼽힌다. 1950년대 당시 화단을 휘감은 앵포르멜(기하학적 추상을 거부하고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전후 유럽의 추상미술)에 기반을 둔 붓터치로 두툼한 질감의 추상화면을 만들었다. 특별했던 것은 그 위에 앉힌 주제 ‘한국적’이다. 전통색이 도드라진 단청 이미지, 불교적 원리·철학을 도상으로 실어낸 만다라 등을 자주 등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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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화백의 작품세계는 하 화백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통·불교색 진한 화풍에 동양과 서양을 오가는 기법은 기본.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여기에 자연을 얹었다는 것이다. 천경자(1924∼2015) 화백에게서 배웠다는 산과 물, 나무와 꽃 등의 정물이 리드미컬한 생명력을 뻗치며 구상과 비구상의 세상을 천천히 오간다.
전시는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류 화백의 작품들로 기둥을 잡고 1980년대 하 화백의 작품을 받치는 걸로 구성했다. 어찌 보면 영영 분리될 수 없는 관계성인지도 모르겠다.
탐스러운 벚꽃나무 두 그루가 화면을 그득하게 채운 가로 4m, 세로 2m의 ‘청화예원’(2018)부터 그렇다. 경기 양평군 청계리 류 화백의 작업실 언저리를 묘사했다는 작품의 배경에는 하 화백의 묘소가 들어 있다. 류 화백은 “남편이 떠난 뒤 심은 벚꽃이 이제 아름드리가 됐다”고 소개한다.
피안(이승의 번뇌를 해탈해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경지)의 세계를 묘사한 작품도 여럿. 그중 백미는 2002년에 완성한 ‘피안’이다. 가로세로가 6m, 2m에 육박하는 이 대작은 물 위에 겹겹이 띄운 산봉우리가 압권인 작품이다. 언뜻 베트남 하롱베이가 보인다. 실제로 류 화백은 “언젠가 하롱베이에서 바다에 둥둥 뜬 산을 보고 한번 그려야겠다”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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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몰두한 ‘대나무’ 작품도 두 점이 나왔는데. 류 화백은 “실재가 아닌 마음속 대나무를 그린 것”이라며 “아픔·괴로움을 걸러내 안온함을 얻으려는 풍경 앞에 세웠다”고 설명한다. 그중 ‘가족’(2018)이 형광색 짙은 매끈한 배경에 죽죽 뻗은 대나무 마디와 잎을 사이좋게 배치했다면, ‘대나무숲’(2019)은 숲이라기엔 허전한 대나무 몇 그루를 형태가 불분명한 점점의 초록 배경에 세워둔 작품.
작은 체구로 어찌 작업을 했을까 싶게 류 화백의 작품에는 대작이 많다. 그중 ‘정토’(부처가 사는 깨끗한 세상·2017)는 가로세로가 7m, 2.5m에 달하는 압도적인 규모다. 바위틈을 뚫고 나온 소나무의 위엄을 분명한 색조로 끌어낸 작품은 100여년 전 왕의 권위를 상징하던 병풍그림이 연상될 만큼 기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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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작품 국립현대미술관서 전시했으면”
두 사람은 부부 예술가로 유명했다. 1970년 예총화랑서 연 ‘부부 전 하인두-류민자’로 화단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게 출발이다. 이후 두 사람이 직·간접적인 효과를 주고받았던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 단청색을 끌어들이고, 오방색 쓰는 것에 대담했던 부부. ‘많이 닮았다’ ‘하인두가 연상된다’ 등 ‘참새 방앗간’ 소리가 안 나왔을리 없었겠지만, 그런 평가에 대해 류 화백은 그다지 신경을 안 쓰는 눈치다. “굳이 벗어난다고 해서 벗어나겠나.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벗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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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화백과 류 화백은 홍대 미대 띠동갑 사제지간이었다. 하 화백은 서양화, 류 화백은 동양화로 전공이 달랐던 터라 본격적인 인연은 류 화백이 졸업한 뒤 덕성여중고에서 교편을 잡으면서였단다. 1967년 결혼해 22년을 살았다. 류 화백은 “많이 아픈 건 나였는데 자기가 먼저 가더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슬하에는 2남 1녀를 뒀다. 3남매 모두가 두 사람의 예술혼을 이어받았다. 장남 하태훈은 드론 사진작가로, 장녀 하태임은 서양화가로, 차남 하태범은 설치미술가 겸 조각가로 활동 중이다.
류 화백은 하 화백을 여전히 “친구면서 선생”으로 기억했다. 그 좋은 벗이자 스승이 불현듯 사라졌으니 허전함이야 말로 표현이 될까. “만약 지금까지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면 내 그림이 더 밝고 명랑해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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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쉬움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겠지. 그이의 남은 꿈 역시 남편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국립현대미술관서 하인두의 작품을 다 모아서 전시 한 번 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전시는 2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