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한국은행 통화정책 결정문은 기준금리 변동의 이유가 압축된 문서다. 분량은 A4 한 장. 금융통화위원들이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쓴 글이다.
지난달 통방문은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견실한 성장세’ 문구가 빠진 것이다. 견실은, 굳을 견(堅)에 열매 실(實)이다. 속이 꽉 찬 성장이라는 뜻이다. 문재인정부 기대감과 함께 지난해 7월 등장한 이 표현이 1년3개월 만에 없어진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 경제는 반도체 외에는 믿을 구석이 없는 게 현실이다. 견실하다는 평가는 다소 민망했을 것이다.
그 대신 자리한 게 ‘잠재성장률 수준의 성장세’다. 경제가 덜 견실하지만 그래도 나쁜 건 아니라는, 그 어느 즈음의 문구를 금통위는 고민했을 것이다.
문제는 정작 한은이 공개를 꺼린다는 점이다. 한은은 분기마다 잠재GDP 규모를 자체 추정하고 있지만, 이를 외부에 알리지는 않고 있다. 한 경제연구기관 인사의 말이다. “고용 쇼크만 봐도 그래요. 어느 때보다 경제의 구조적인 변화가 크다고 봅니다. 잠재성장률을 현실과 가깝게 추정하는 작업을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복수의 금통위원들도 “한은은 잠재성장률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유가 있다. 한은은 특수한 기관이다. 무엇보다 정책의 시계(視界)가 ‘중장기’에 있다. 햇수로 치면 2~3년이다. 단기 성과에 매달리는 정치권력과 약간 거리를 둬야 한다는, 우리 사회가 한은에 부여한 ‘독립성’의 핵심이다. 잠재성장률은 그 자체로 장기 시계가 바탕이다. 어쩌면 기준금리 못지않은 한은의 또다른 책무일 수 있다.
한은의 입장도 일리는 있다. 잠재성장률 관측의 불확실성이 높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한 인사는 “자칫 부정확한 숫자가 나가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틀릴까봐, 그로 인해 신뢰를 잃을까봐 침묵하는 건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 참에 한은이 정례화(定例化) 방안을 검토했으면 한다. 2013년 4월→2015년 12월→2017년 7월. 최근 한은의 잠재성장률 공개 주기다. 다음은 또 언제인지 알 수 없다. 1년이든, 2년이든, 정기적인 발표가 경제주체의 불확실성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자는 믿는다.
한 나라가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최대 성장치다. 경기의 과열 혹은 후퇴와 상관없이 적정한 경로를 보여주는 일종의 ‘신호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