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서가]②유재훈 "책에서 완벽한 낯섦 만끽…침대 못벗어나면 죽은삶"

  • 등록 2016-02-17 오전 6:11:00

    수정 2016-02-17 오전 6:11:00

△유재훈 한국예탁결제원 사장이 서울 여의도 사옥에서 인생의 책으로 꼽은 ‘나는 걷는다’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한대욱 기자)


[대담=이정훈 이데일리 증권시장부장·정리=임성영 기자]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라는 프랑스 단어가 있다. 우리 말로는 `완벽한 낯섦`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데페이즈망을 가장 효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독서다. 책을 통해 내가 처한 현실과 가장 반대되는 상황을 간접 경험하면서 일상에서의 탈출을 시도하곤 한다.”

16일 서울 여의도 사옥에서 만난 유재훈 한국예탁결제원 사장은 “어린 시절부터 여행기 읽기를 즐겨했다”며 “책을 읽는 순간만이라도 바쁜 현실에서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나는 걷는다` 저자의 결심·실천, 인생의 좌표 되돌아보게 해

지금도 유 사장은 서점에 가면 경제학이나 인문학 코너보다 여행기 코너를 찾는다. 학창시절에도 세계사와 세계지리를 좋아했다. 마르코 폴로와 바스코 다 가마 같은 탐험가를 동경했던 유 사장은 ‘로빈슨 크루소’를 적어도 50번은 읽었다. 지금도 책 내용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 정도다. 유 사장은 “여행기라고 모두 다 선호하진 않는다”면서 “진정한 여행기는 새로운 곳에서 자신이 본 것을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새로움을 보고 느낀 것을 사유(思惟)와 반추(反芻)의 과정을 통해 독자들과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작가들이 쓴 여행기가 독자들과 공감한 부분이 많다는 게 그의 평가다.

그는 “현존하는 많은 여행기가 새로운 곳에서 이색적인 것을 만끽하는 것에 그쳐 여행가이드 북 혹은 자아도취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고 토로했다. 유 사장은 이러한 여행기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책으로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를 꼽았다. 책을 읽기 시작한 날과 완독한 날을 표시해 두는 유사장은 4개월만에 3권을 완독했다. 모두 읽고난 뒤로도 서재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책을 꽂아두고 수시로 꺼내 읽곤 한다. 유 사장은 “아주 바쁜 시기였는데도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면서 “작가가 여행을 시작한 나이 만으로도 충격 그 자체였다”고 회고했다.

기자였던 올리비에는 지인들이 모인 62세 은퇴 파티에서 “앞으로 4년간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만2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실크로드를 걸어서 여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곤 손수 만든 뒤 `에브니(EVNI)`라는 애칭을 붙인 작은 수레에 의지한 채 젊은이도 나서기 쉽지 않은 여행길에 올랐다. 유 사장은 “작가의 결심과 실천은 100세 시대를 사는 50대에게 인생의 좌표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그는 “더욱 흥미진진한 내용은 작가가 현대인의 여행과는 완벽히 다른 느림·비움·침묵을 실천하는 여행을 한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현대인 특히 우리나라 사람의 많이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춘 빠른 여행과는 다르다는 것. 비단 여행뿐 아니라 삶 자체를 봐도 그렇다. 이어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인생에서 속도경쟁을 하지 않는 것, 비움으로써 얻는 새로운 행복감이 뭔지를 여실히 느끼게 해줬다”며 “물론 현실에서 실천하는 게 쉽지는 않다”며 웃었다.

◇“시장성 기업화·예탁산업 분리…침대 못벗어나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

여행기를 통해 일상에서의 탈출을 만끽하는 유 사장은 경영에서도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예탁결제원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그는 줄곧 새로운 것을 찾았다. 독점 사업을 하는 예탁결제원과 직원들은 유 사장이 취임하기 전까지 다소 보수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유 사장은 취임한 후 예탁원이 법정설립기관의 성격을 유지함에 따라 국제 경쟁력 및 수익 창출에 한계를 보이고 있고 경영상의 도덕적 해이가 빚어지기도 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전통적인 주식거래 의존형 사업구조로는 핵심 인프라에 대한 투자와 리스크 관리에 필요한 자본 여력을 확충하기가 어렵고, 예탁결제산업의 개방 없이 개도국 등에 개방을 요구할 명분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자본시장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예탁결제서비스 운영체제를 국제규범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판단한 유 사장은 실행에 옮겼다. 정부와 최대주주인 한국거래소 눈치도 보지 않았다.

우선 예탁결제원을 특수법인에서 주식회사로 전환해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공식석상에 나서면 주식회사 전환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법적 독점을 폐지해 국내·외 경쟁 환경 속에서 서비스 경쟁력을 높이고 경영상 비효율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는 걷는다’를 읽으며 깨달은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고 있다”며 “올리비에가 여행중 고난이 닥쳤을 때 그랬듯 안달복달하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시도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예탁결제원의 시장성 기업화, 예탁제도 분리 등과 관련된 여러 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의 높은 관문을 통과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갈길을 가겠다는 의지다. 현재 예탁원의 분리독립과 관련된 거래소의 예탁원 지분 매각, 예탁원의 시장성 기업화에 필수불가결한 전자증권법 등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법안은 국회에서 표류돼 있다.

유 사장은 “예탁원은 국내 금융과 관련된 사업을 하는 회사 가운데 글로벌 회사가 될 수 있는 요건을 가지고 있다”면서 “자본시장뿐만 아니라 비상장, 벤처, 스타트업, 클라우드 시장까지 금융시장 모든 후선업무를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탁원이 글로벌 선진 예탁결제사(社)가 되기 위해선 큰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며 그 변화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지속될 것이라는 것. 아울러 “블록체인, 빅데이타, 핀텍 등 혁신 비즈니스 모델을 가장 먼저 실현하는 곳이 예탁원”이라면서 “이 세 가지 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삼고 지속 성장의 돌파구를 찾고 있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유 사장은 덮어뒀던 책을 다시 펼치며 `자신의 침대에서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래서 절대 그 곳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책속 글귀를 직접 읊으며 “가장 감명 깊었던 대목인데, 비단 사람뿐 아니라 조직도 이 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재훈 예탁결제원 사장은

행정고시 26회 출신으로 금융위 증권감독과장, 기획재정부 국고국장 등을 지냈고 아시아개발은행(ADB)과 세계은행(IBRD)에서 이코노미스트로 근무했다. 이후 금융위 대변인과 한나라당 수석전문위원을 역임한 후 증권선물위원회 상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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