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훈의 맛있는 혁신]오래 기른 맛

과일·고기, 수확·도축시기 따라 맛 '천차만별'
경제 논리에 밀려 '오래 기른 맛' 못 봐 아쉬움
  • 등록 2018-11-08 오전 6:00:00

    수정 2018-11-08 오전 6:00:00

지난 7월3일 전북 전주시 원당동 하태조 농가에서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주최로 열린 ‘조생종 복숭아 유미 현장 평가회’에서 무봉지 재배로 키운 조생종 복숭아 ‘유미’가 주목에 탐스럽게 달려 있다. (사진=농촌진흥청)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푸드비즈니스랩 소장] 술을 만들 때에는 당이 필요하다. 알코올을 만드는 발효 과정에 당은 필수적이다. 당이 발효되면서 알코올과 탄산이 나온다. 한참 익고 있는 막걸리에서 탄산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다. 이 세상의 모든 술은 이와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다. 당은 술을 만드는 효모의 먹이로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먹이이기도 하다. 인간은 당 섭취가 없으면 얼마 살지 못해 사망에 이른다. 즉, 당은 여러 모로 우리에게 중요한 에너지원이다.

사탕수수에서 추출하는 설탕은 당 결정체 그 자체다. 이를 싸게 수입해서 쓰고 있는 우리에게 당은 이제 너무나 흔해서 오히려 피하고 싶어할 정도지만, 예전에 당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이 애초에 농사를 지은 이유는 당을 얻기 위해서였다. 당을 섭취해야 인간은 생존할 수 있었고, 안정적으로 당을 섭취하고 싶었던 인간은 불확실한 채집 활동을 극복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농사를 통해 과일에서, 또 곡물에서 당을 얻으며 생존의 문제를 극복하며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성공적인 농사 활동은 잉여 농산물을 낳았고, 잉여 농산물에는 잉여 당이 존재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당은 알코올을 만드는 효모의 좋은 먹이다. 인간은 잉여 포도로 포도주, 즉 와인을 만들어 먹었고 잉여 사과로 사이더(Cider)를 만들어 먹었다. 사과로 만들어 마신 술, 사이더는 우리가 사먹는 ‘사이다’의 원형이다. 이런 잉여 농산물을 활용한 술 제조는 해당 지역의 식문화 일부분으로 자리잡는다.

반면 곡물은 당화 과정을 한번 더 거쳐야 발효에 필요한 당을 얻을 수 있는데 보리가 많이 나는 곳에서는 맥주가, 쌀이 많이 나는 우리나라에서는 막걸리가 발달하게 되었다. 막걸리를 걸러 내면 청주, 증류하면 소주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술을 빚을 때 전통적으로 쌀을 많이 활용했지만, 최근에는 국내 자생하는 다양한 과일로 과실주를 빚고 있다. 사과, 복분자, 매실, 오미자 등을 활용한 과실주들이 많이 출시되고 있다. 외국인들에게 물어 보면 흔히 한국을 대표하는 과실주로 복분자주와 매실주를 꼽는다. 그런데 시중에 판매되는 매실주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는데, 이 매실주가 실은 매실주가 아닌 포도로 빚은 포도주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마트에 판매 중인 매실주를 하나 집어 들어 성분표를 살펴 보면 ‘과실주원액(스페인)’이라는 묘한 표현이 있다. 다른 회사가 제조한 매실주의 성분표를 살펴 보자. 이번엔 좀 더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백포도주원액(스페인)’이라고 쓰여 있다. 즉, 우리가 마시는 대부분의 매실주는 매실을 발효한 게 아니라 수입한 백포도주에 매실 액기스를 타놓은 것이다. 약간은 분개할만 하지만 실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국내 주류 산업을 관장하고 있는 국세청의 견해에 따르면 매실로는 과실주를 담글 수가 없다. 매실에는 당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당이 없으면 발효가 되지 않는다. 포도, 사과, 복분자, 심지어는 오미자와 대추도 갖고 있는 당이 매실에는 없다니….

매화나무에 매화가 열리고 90일 즈음이 된 초여름이 되면 푸른 매실을 수확할 수 있다. 이 청매(靑梅)의 당도를 측정해보면 실제 0 브릭스(Brix·당도를 나타내는 척도)로 나온다. 즉, 청매엔 당이 없다. 모든 과일은 당이 있기 마련인데, 가련한 매실은 당도 없는 과일이란 말인가, 아니면 당이 없으니 과일도 아니란 말인가.

전국에 유통되고 있는 거의 모든 매실은 이렇게 90일 전후에 수확한 청매이다. 그런데 매실이 나무에서 100일 이상 달려 있으면 색이 노랗고, 불그스름하게 변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청매랑 구분해 황매(黃梅)라고 한다. 이 황매가 120일 정도까지 나무에 달려 있으면 그 색은 더욱 농익는다. 이 노릇불긋한 매실의 당도를 측정하면 7~8브릭스까지 나온다. 제주 조생종 노지귤 정도의 당도이다. 이 120일 매실을 한입 깨물어 보면 상당한 당도와 함께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놀라운 향이 느껴진다. 살구도 아닌, 복숭도 아닌 새로운 맛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매실은 원래 과일이 맞다. 매실도 발효 가능하다. 이걸 국세청에 빨리 알려줘야 하는데….

매실을 오래 기르면 당도도 올라가며 색과 함께 향미 성분도 달라진다. 어떤 과일이든 나무에 매단 채 오래 기르면 당도와 함께 풍미가 올라간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전에 수확을 해버린다. 경제성의 이유이다. 과일이 나무에 오래 달려 있으면 자연 재해를 입을 가능성이 달려 있는 시간만큼 더 올라간다. 그래서 빨리 수확한다. 또 잘 익은 과일을 수확하면 유통 과정에 물러져 버리게 되고, 물러진 과일은 소비자들이 사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수확한다. 우리가 오래 기른 맛을 모르는 이유다.

이렇게 오래 기른 맛은 비단 과일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10년 이상을 사는 돼지를 우리는 6개월 만에 도축한다. 역시 10년 이상 사는 닭을 한 달만에 도축하며, 20년 이상 사는 소를 3년 만에 도축해 소비한다.

모두 경제성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스페인산 이베리코 돼지는 2년을 기른 돼지이다. 품종의 차이와 함께 오래 기른 맛이 다르다는 것을 소비자들이 알아채기 시작했다. 1년 이상 기른 제주 구엄 토종닭의 맛은 말로 이루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얼마 전 유럽 출장에서 먹었던 쇠고기 스테이크는 12년을 사육한 소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오래 기른 깊은 육향이 났다.

오래 기른 맛을 즐기고 싶다면 답은 간단하다. 소비자들이 원하면 된다. 그리고 소비자들이 돈을 조금 더 내면 생산자들은 그렇게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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