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일제 청산과 경복궁 땅속 말뚝들

  • 등록 2019-08-16 오전 6:00:00

    수정 2019-08-16 오전 6:00:00

경복궁 전면에 세워져 있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작업이 시작된 것은 김영삼 대통령 당시이던 1995년의 일이다. 광복 50주년을 맞으면서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정이었다. 당시 군 내부의 핵심 계보였던 하나회 해체를 비롯해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실시 등 문민정부가 밀어붙였던 여러 굵직한 정책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끈 작업이었음은 물론이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는 김 대통령의 격앙됐던 표현에서도 과거 식민지 역사에 대한 응보 의지를 읽게 된다.

광화문이 제자리를 찾아 이전되는 작업도 민족정기를 되살리겠다는 역사적 의미에서는 다르지 않다. 조선왕조를 지켰던 정궁의 수호문인데도 일제에 의해 건춘문 옆으로 밀려났다는 자체가 민족의 상처였다. 역시 조선총독부가 건립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태다. 결국 고증에 심혈을 기울인 끝에 2010년에야 지금처럼 제자리로 복원됐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이던 1968년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됐다가 고증에 착오가 있었다는 지적에 따라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작업과 함께 다시 복원작업이 추진된 것이니, 이중고의 작업이었다.

그 뒤에도 역대 정부를 거치며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노력이 이어져 왔다. 반면 일본 정치 지도자들의 망발도 끊이지 않았다. 독도 영유권은 물론 역사교과서 왜곡, 야스쿠니 신사참배 등을 둘러싸고 공방이 이뤄졌다. 그중에서도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해법을 둘러싼 갈등으로 첨예하게 대립해 있다. 한·일 양국이 서로 미래지향적인 진정한 선린관계를 얘기하면서도 불행했던 역사의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입장에서는 차이가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자발적인 불매운동이 일본에 대한 분노를 여실히 증명한다. 자동차와 맥주, 의류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응집력이 발휘되고 있다. 여행도 거의 중단된 단계다. 과거 불매운동 때마다 슬며시 꼬리를 내림으로써 은근히 비웃음을 샀으나 이번에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제도 광복 74주년을 맞아 전국에서 식민 잔재를 청산하자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렇다고 이러한 움직임이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기본 취지는 이해하면서도 감정적으로 앞서 나간다는 생각을 감추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청주’냐 ‘사케’냐 하는 논쟁에 이르러서는 너무 편협하다는 느낌을 줄 뿐이다. 심지어 한일협정 무효화 주장까지 제기되는 상황이다. 더 나아가 우리 생활 속에 고착화된 요소들까지 걸러내겠다는 것이니, 누구라도 걸려들기만 하면 자칫 희생양이 되기 십상이다. 친일파를 청산한다는 뜻에서 반일 운동을 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해방공간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한 인물들을 추종하는 풍토도 잘못이다.

일제 청산 작업의 뒷처리가 소홀한 것도 문제다. 광화문을 복원했다고 하면서도 현판 하나 제대로 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새로 만든 현판에 금이 가고 색깔이 잘못됐다는 시비에 이르러서는 민족정기를 되살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 자신의 노력에 대해서도 성찰이 요구된다.

복원된 경복궁 땅 밑에 송곳처럼 촘촘히 박혀 있는 말뚝에 대해서도 새로운 조치가 필요하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세우면서 지반을 다지기 위해 곧추 박아놓은 것이지만 총독부 청사 해체 과정에서 이 말뚝들을 발견하고도 그대로 흙을 덮어 복원한 것이 지금 모습이다. 그렇게 박혀 있는 소나무 말뚝이 무려 9300여개의 이른다니, 땅밑에서 궁궐 터줏대감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보이지 않는 땅속이라고 슬쩍 처리해 버리고는 일제 잔재를 청산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북악산에서 청와대와 광화문 광장까지 이어지는 서울 중심에서의 식민 청산 현주소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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