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차라리 위안부합의 파기가 당당하다

  • 등록 2019-02-15 오전 6:00:00

    수정 2019-02-15 오전 6:00:00

드디어 아키히토(明仁) 일왕까지 논쟁 대상에 올랐다. 최근의 한·일 관계가 과거 어느 때보다 악화 상태에 처해 있음을 말해준다. “일왕이 직접 위안부 할머니들의 손을 잡고 사죄해야 한다”는 문희상 국회의장의 언급이 발단이다. ‘전쟁범죄 주범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더욱 직설적이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히로히토(裕仁)가 그의 부친임을 상기시키려는 뜻일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물론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초계기 갈등까지 얽혀 있는 상황에서 ‘일왕 사과’라는 돌발 변수가 추가된 셈이다.

일본 측에서는 “말조심하라”며 반격이 쏟아진다. 일왕이 일본 사회에서 상징적인 존재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위안부 책임론까지 새로 거론됐다는 점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무례한 발언”이라는 날선 반응이 나올 만도 하다. 특히 아키히토 일왕이 오는 4월 말로 퇴위를 앞두고 있는 마당이다. 올해 여든여섯 나이인 그에게 연민의 감정이 한껏 쏠린 상황에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키히토가 직접 사과할 경우 위안부 문제가 과연 일거에 해결될 수 있을까. 하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아무리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고 해도 분이 풀리지 않는 법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전적인 형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더구나 한창 꽃다운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로 끌려가 만신창이 신세가 된 할머니들이다. 그 누가 몇 마디로 사과한다고 해서 가슴에 겹겹이 맺힌 한이 풀릴 수 있겠는가.

위안부 문제에 일왕이 사과를 표명한다는 자체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아키히토는 1990년 도쿄를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에게 ‘통석의 염’이라는 표현으로 과거사에 대해 총체적인 유감을 표명한 바 있다. 이러한 유감 표명을 사과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만 개별 사안에 대해 사과를 받아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사과는 분명히 받아내야 하지만 일본 측은 이미 할 일을 다했다는 입장이다. 전임 박근혜 대통령 때 이뤄진 위안부 합의의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이라는 문구를 근거로 내세운다.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은 다소 애매한 편이다. 합의가 잘못됐다고 하면서도 정작 파기를 선언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의 출연으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의 해산 절차만 밟고 있을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유부단하게 끌고갈 게 아니라 차라리 합의를 파기하고 원점에서 시작하는 게 마땅하다. 어정쩡한 상태로는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될 수 없다. 불행했던 역사의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상반된 위치에서 서로 수긍할 만한 타협점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마냥 변죽만 울리면서 마찰을 확대 재생산하는 지금 모습보다 더 상황이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입장이 당당하기만 하다면 국가 간의 약속을 뒤집었다는 비난도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

위안부합의를 파기하지 않겠다면 이제는 문제를 확대하기보다 점차 간격을 줄여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비단 위안부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현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과거 식민지배 역사에 대해 한국에 사과해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올해로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는다는 점에서 양국 관계에 과거사 극복을 위한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돼야 한다. 울타리를 맞댄 이웃끼리 언제까지나 반목하면서 지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 지도자들도 원점으로 돌아가 양국의 바람직한 미래관계를 생각하기 바란다. 각자의 발언에서부터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일본 지도자들에게도 당연히 해당된다. 가능하다면 서로 밀사를 파견해 물밑에서라도 허심탄회한 대화를 주고받기 바란다.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해결되기보다 갈등만 확대될 뿐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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