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어찌 냉면을 탓하랴

  • 등록 2018-11-09 오전 6:00:00

    수정 2018-11-09 오전 6:00:00

개인적 기호의 영역인 식도락이 갑자기 한반도 정치 무대로 뛰어올랐다. ‘목구멍’ 논란을 불러온 냉면이 그 주인공이다. 우리의 전래 음식 중에서도 가장 찬사를 많이 받는 냉면의 이미지 변신이다. 딱하게 된 것은 식사 자리에서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는 핀잔을 받은 기업 총수들이다. 그룹의 울타리 안에서는 마치 군주에 버금가는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냉면 사리를 추가로 시켰다가 동석했던 리선권 북한 조평통 위원장으로부터 졸지에 힐난을 받은 것이다.

한 그릇에 4500원짜리 냉면을 놓고 벌어진 일이라는 자체가 어이없다. 더구나 평양냉면의 본포라는 옥류관에서 일어난 사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의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지난 9월의 일인데도 이처럼 뒷얘기가 늦게 전해진 데서도 현재 진행되는 남북대화의 폐쇄적인 단면을 돌아보게 된다. 북한에서는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가”라는 대화가 일상적이라는 얘기가 없지 않지만 정상회담에 수행한 초면의 손님들에게 ‘목구멍’이라고 언급한 자체가 상식을 넘어선 처사다.

이미 남북 간 대화에 있어 서먹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촉매 역할을 했던 것이 또한 냉면이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처음으로 마주앉은 지난 4월의 판문점 정상회담 만찬 때는 냉면을 뽑기 위해 평양 옥류관에서 사용되는 제면기까지 동원된 바 있다. 정상회담이 끝나고 장안의 이름난 냉면집마다 손님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을 보여준 데서도 그 치솟은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냉면이 한반도 평화의 전령사로 자리 잡았다”는 표현을 들을 만했다.

그런데, 리선권의 돌출 발언으로 냉면 이미지가 단번에 퇴색할 처지에 놓인 셈이다.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식사 도중 갈등이 불거져서는 누구에게나 부담일 수밖에 없다. “국숫발이 질기지 않고 먹기에 맞춤하며 맑은 고깃국물에 동치미 국물을 섞어 감칠맛이 살아난다”는 북한 조선중앙통신의 이례적인 평양냉면 예찬론조차 무색해져 버렸다. 1948년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김일성과 담판을 지으려고 평양을 방문한 길에 냉면집에 들러 두 그릇을 연달아 비웠다는 일화를 남긴 백범 김구 선생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일이다.

이처럼 몰상식한 경우가 너무도 자주 일어난다는 게 문제다. 리선권의 경우만 해도 공격성 발언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화의 남쪽 파트너인 조명균 통일부장관에 대해서는 물론 우리 기자들에게 강경한 어조와 거친 표현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기선 제압으로 몰아붙이며 주도권을 잡으려는 수법이라고 하지만 그때마다 용인하고 넘어간 우리 측에도 잘못이 없지 않다. 북측이 우리와 사전 협의도 없이 번번이 회담 일정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거나 변경했던 행태도 마찬가지다. 설사 개인적인 성격 탓이라고 해도 최상부의 묵인 없이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이러한 사태에 대해 슬그머니 넘어가려는 정부와 여당의 태도다. “확인해 보니 그런 일이 없었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당초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가 언급을 회피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화기애애하게 진행되는 남북대화 분위기를 가급적 깨트리지 않으려는 뜻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남북 화해가 이뤄진들 얼마나 진정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다른 모든 문제를 떠나 리선권의 막말에 면박 받은 총수들의 ‘냉면 트라우마’가 어떤 식으로 나타날 것인지 궁금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의 이재용 부회장까지 눈치를 보는 장면이 공개됐다. 식사 자리에서 일어난 순식간의 촌극이므로 모멸감을 느낄 새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냉면 그릇을 앞에 놓고 젓가락질을 할 때마다 목멜 것이라는 정황만큼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래도 냉면의 잘못은 아니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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