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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정현 기자] 디플레이션은 극단적인 현상이다. 물가상승률이 일정기간 지속적으로 0% 이하로 떨어지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까다로운 조건이 하나 더 있다. ‘자기실현적(self-fulfilling) 기대 경로를 통해’ 상품과 서비스 전반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물가가 앞으로 더 떨어질 것이라고 믿고 소비와 투자를 미뤄 실제로 물가가 더 떨어지는 악순환이 나타나야 진짜 ‘D(디플레이션)의 공포’가 시작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중요한 게 기대인플레이션 지표다. 통계청이 지난 3일 발표한 소비자물가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를기록하자 한국은행이 서둘러 기대 인플레이션을 수치를 포함한 설명자료를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은은 마이너스 물가가 디플레이션의 전조가 아니라며 근거로 기대인플레이션 수치를 내밀었다. 한은이 조사한 지난달 국내 기대인플레이션은 2.0% 정도다. 국민들은 여전히 연간 2% 정도의 물가 상승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는 뜻이다. 한은은 “일반인 기대인플레이션이 물가안정목표인 2% 수준을 나타내고 있어 자기실현적 물가 하방 압력을 어느 정도 제어한다”고 했다. 물가가 마이너스를 기록한 건 소비 침체 때문이 아니라 작년 폭염 탓에 급등했던 신선류 가격 하락에 따른 기저효과 영향이 크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그런데 잘 보면 숫자가 영 어색하다. 일본 수치는 일반의 기대인플레이션이 아닌, 전문가 컨센서스다. 전문가 컨센서스는 물가 상승률이 얼마나 될지 전문가들이 예상한 수치를 평균해 놓은 숫자다. 전문가들이 전망한 수치니 실제 물가 상승률과 비슷하게 나오는 건 당연하다.
일본의 경우 내각부와 일본은행(BOJ)이 일본 국민들의 기대인플레이션을 조사해 발표한다. 최근 조사한 일본의 기대인플레이션은 3% 정도였다. 한국의 기대인플레이션(2%)보다 오히려 높다. 일본 전문가들의 물가 컨센서스가 실제 물가상승률과 비슷한 0%대를 나타낸 것과는 차이가 크다.
작은 실수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실수도 한은이 물가 문제를 그다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인가 싶어 우려스럽다. 물가안정목표제 운영상황 설명회(물가설명회)를 폐지한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은행법 1조는 한은의 책무가 물가안정에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물가관리 실패는 한은의 책임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