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로 불려야 했던 작가, 뮤지컬로 재탄생하는 유작

서울예술단 신작 '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작가 2016년 발표 장편소설 무대화
'영 어덜트' 장르의 "어두운 '해리포터'"
담당 편집자가 전하는 박 작가의 작품 세계
  • 등록 2018-09-20 오전 6:00:00

    수정 2018-09-20 오전 6:00:00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원작자 작가 박지리(사진=사계절출판사).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1985년 전남 해남 출생. 25세 나이에 장편소설 ‘합체’로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등단. 문학 전공도 아니고 따로 문학을 공부한 적도 없음. 대표작은 장편소설 ‘맨홀’ ‘양춘단 대학 탐방기’와 단편집 ‘세븐틴 세븐틴’의 표제작 등. 201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남긴 작품은 단 7편. 박지리 작가를 설명하는 짧은 프로필이다.

문학계에서는 재능 있는 작가로 주목했으나 대중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박 작가의 유작이 뮤지컬로 무대에 오른다. 서울예술단이 신작 창작가무극으로 선보이는 ‘다윈 영의 악의 기원’(10월 2~7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이다. 원작은 무려 856쪽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장편소설. 이번 공연에 참여하는 연출가 오경택은 원작을 “어두운 ‘해리 포터’ 같다”고 평가한다.

한국 문학계에서 흔치 않은 장르소설이라는 점에서 뮤지컬 제작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최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난 사계절출판사의 김태희 기획팀장은 “소설 출간 이후 신진 극작가와 뮤지컬 제작사 등에서 뮤지컬 제작 제안을 해왔다”며 “서울예술단이 원작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 제작을 추진해 이번 작품을 함께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생전에 남긴 작품 단 7편

김 팀장은 박 작가의 모든 책을 담당해온 편집자이자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금 박 작가를 대신해 박 작가의 작품 세계를 설명해줄 수 있는 인물이다. 김 팀장이 박 작가로부터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의 원고를 받은 것은 2015년 6월 어느 날의 일. 김 팀장은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원고를 한 호흡에 다 읽을 정도로 흥미로웠다”며 “박 작가가 이 작품으로 정말 뜰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 팀장이 확신을 가졌던 것은 작품이 지닌 독특한 색깔 때문이었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최상위 계층인 1지구에서 최하위 계층인 9지구까지 철저하게 구획된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1지구의 유서 깊은 명문학교 프라임스쿨에 재학 중인 16세 소년 다윈 영을 주인공으로 죄와 벌, 선과 악, 법과 정의, 나아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을 흥미롭게 던진다. 김 팀장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 가상의 시공간을 무대로 하지만 한국사회의 현재와도 맞닿아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박 작가를 “천재”라고 표현했다. 담당 편집자로서의 애정 때문만은 아니다. 김 팀장은 “박 작가의 소설은 하나를 보면 또 다른 작품을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며 “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철학적 깊이가 있는 내용을 직관적인 글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천재라 불러도 과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 작가가 생전에 발표 작품은 저마다 색다른 개성을 자랑한다. 키가 크고 싶은 두 형제가 계룡산에 들어가 도를 닦는다는 독특한 설정의 등단작 ‘합체’, 19세 나이에 살인자가 된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그린 ‘맨홀’, 대학 청소 노동자의 시선으로 한국사회를 그린 ‘양춘단 대학탐방기’까지 소재도 내용도 다채롭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지난해 12월 출간한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맨(MAN)에 관하여’는 대학과 취업 문제를 희곡 형식으로 풀어냈다. 박 작가가 생전에 남겨둔 마지막 원고인 ‘번외’도 곧 출간을 앞두고 있다.

김 팀장은 “박 작가는 기존 작가들과 전혀 다른 문학세계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퍼 리도 ‘앵무새 길들이기’와 ‘파수꾼’ 단 2편만을 남긴 것처럼 박 작가도 비록 7편의 작품만 남겼지만 먼 훗날까지 계속 읽게 되는 고전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덧붙였다.

서울예술단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콘셉트 이미지(사진=서울예술단).


◇방대한 원작 150분 공연으로 압축

서울예술단이 창작가무극으로 만드는 이번 공연에 거는 기대도 단 하나다. “박 작가가 사람들에게 더 알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번 공연은 오경택 연출 외에도 극작가 이희준, 작곡가 박천휘가 참여해 원작 색깔을 그대로 살린 작품을 준비 중이다. 김 팀장은 “극본이 방대한 원작을 150분 분량으로 잘 압축해서 만족스러웠다”며 “뮤지컬로 만들어지게 된 지금까지의 과정이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계속 공연할 수 있는 작품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 작가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생전에 외부 활동을 자주 안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흔한 스마트폰도 쓰지 않았다. 지난 9월 초 있었던 제작발표회에서 김 팀장은 “박 작가가 살아 있었어도 이 자리에는 오지 않았을 것 같다”며 “자신의 작품이 뮤지컬로 만들어지는 걸 좋아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 작가의 생전의 이야기와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도 궁금증이 많다. 그러나 김 팀장은 “박 작가의 작품이 ‘죽음’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를 보면 차원이 뒤집어진 세계가 등장한다. 박 작가도 그런 ‘뒤집어진 세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지 못할 뿐 여전히 우리와 같이 있는 것이다.” 작가는 세상을 너무 빨리 떠났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지금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예술단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콘셉트 이미지(사진=서울예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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