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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밟아도 밟아도 죽지만 말라/ 또 다시 태어나는 봄이 오리라.’ 일제 강점기 시절 강제 징용돼 노역에 시달렸던 한국인들은 탄광에서, 철로에서 ‘밟아도 아리랑’을 불렀다. 창씨개명과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민족 정체성이 말살될 위기 속에서도 민족정신은 피어났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다.
등단 50년을 맞이한 윤흥길(76) 작가가 장편소설 ‘문신’(문학동네)으로 돌아왔다. 20년 만에 발표하는 장편소설로, 올해 1권부터 3권까지 출간되며 4권과 5권은 내년에 나온다.
11일 서울 중구 세종로 세종문화화관 내 한 식당에서 열린 ‘문신’ 출간기념 간담회에서 윤 작가는 “우리가 거쳐온 과거를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일제 강점기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며 “우리 것을 되찾을 순 없어도 잊어버리지는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집필계기를 밝혔다.
△“부병자자·밟아도 아리랑 모티브”
“당시 한국 남자들은 전쟁에 나가 죽을 경우 시신으로라도 고향에 돌아와 묻히고 싶다는 마음으로 몸에 문신을 새겼다. 이규태의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읽다가 ‘부병자자’를 접하고 소설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병자자’는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치열한 귀소본능을 상징하는 것이다. ‘부병자자’와 ‘밟아도 아리랑’이 작품을 쓰는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
입체적인 등장인물과 문장, 어휘에 신경을 써서 집필했다. 전라도의 판소리 정서, 율조 등을 다뤘다. 소설에서 기회주의자로 그려지는 산서의 대지주 최명배는 특히 공들여 형상화한 인물이다.
“최명배는 판소리 ‘흥보가’에서 놀부와 같은 인물인데, 놀부가 실은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일 수 있다. 고집스럽게 단어를 연구하고 수집하며 우리 말들을 되살려냈다. 시대에 역행하고 있는 느낌도 들지만, 독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쌓아온 문학적 역량을 모두 쏟아붓겠다는 심정으로 썼다. 남은 생에 이런 작품은 다시 쓰지 못할 것이다.”
△끈기와 지구력으로 집필활동
윤 작가는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돼 등단했다. 이후 교과서에도 실린 ‘장마’부터 ‘완장’ ‘황혼의 집’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의 작품으로 현대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반백년 세월동안 글을 써오며 어려운 고비도 여럿 넘겼다. ‘문신’만 해도 두번이나 연재하던 문예지가 폐간하면서 강제로 중단해야 했다.
“1980년대 초에 대학병원에서 뇌 CT를 촬영한 적이 있다. ‘불치병이냐’고 묻는 나에게 의사가 웃으며 ‘창조적인 일에 종사하는 분들은 전두엽이 크게 발달이 돼 있는데 선생님의 전두엽은 그냥 보통 사람 사이즈다’라고 하더라. 그때 내가 천재가 아니라 범재(평범한 재주를 가진 사람)라는 걸 알았다. 하하. 모자란 천재성을 보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하루종일 앉아서 글을 쓰는 끈기와 지구력이 지금까지 작가 생활을 이어온 비결이다.”
문학계가 가벼운 소설 위주로 흘러가는 경향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했다. 윤 작가는 “대하소설이나 경장편, 장·단편 등 여러 문학의 형태가 공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며 “우리 문학계가 획일화된 모습을 버리고 다양한 작품을 수용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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