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미국 위스콘신주 밀위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선 그날 마침 4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끝낸 한 남성이 무대 위에 올랐다. 그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이민·경제 정책을 싸잡아 맹비난했다. 그는 “우리(미국)를 상하이 배터리 공장과 콩고 노예 노동의 처분에 맡기고 있다”며 강력한 보호주의 입장을 표했다. 바로 피터 나바로 현 미국 백악관 무역·제조업 선임 고문(76)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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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첫날 서명한 ‘미국 우선주의 무역정책’ 각서, 철강·알루미늄 관세의 예외 없는 적용, 최근 발표한 상호 관계 계획 등은 모두 나바로 고문의 ‘작품’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나바로 고문은 호전적 성향의 관세 옹호론자이며 중국 매파로,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 책사’로 불린다.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2기 청사진으로 여겨졌던 보수 제언집 ‘프로젝트 2025’의 무역 부문을 집필한 이도 나바로 고문이다.
“나의 피터”…트럼프, 전폭적 신뢰
나바로 고문은 트럼프 집권 1기 때부터 백악관 핵심인물로, 보호무역 정책을 제시하고 고율 관세를 앞세운 대중국 무역 전쟁을 설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나바로 고문의 내정을 알리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불공정한 무역 협정을 재협상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설명했다. 2018년 당시 미국 시사잡지 디애틀래틱은 나바로 고문을 “트럼프의 무역 정책 뒤에 있는 미치광이(madman)”이라고 평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나바로 고문은 1기 때 보다 현재 백악관 내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당시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 국장이었던 그는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이나 게리 콘 국가경제워원회(NEC) 위원장 같은 자유무역 지지 성향의 인물들과 종종 충돌했다. 이번 행정부의 경우 그리어 대표 후보자는 보호무역 지지자이며, 루트닉 상무장관도 관세 옹호론자로 최근 전향해 세 사람이 훨씬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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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로 고문의 막강해진 영향력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에서 비롯됐다. 두 사람은 집권 1기 때부터 함께 했지만 나바로 고문의 수감 이후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나바로 고문은 미국 하원에서 민주당 주도로 실시된 1·6 의사당 폭동 사태 특별위원회의 소환 요구를 거부, 의회모독죄로 지난해 4개월간 수감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한 바이든 행정부 기간 전직 대통령 최초로 4차례 형사 기소됐으며 머그샷(수용자 기록부용 사진)까지 촬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바로 고문의 수감을 두고 “‘딥스테이트’(deep state·비밀리에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관료 집단)로부터 끔찍한 대우를 받았다”고 말했다. 동고동락한 사이인 셈이다.
나바로 고문이 출소 직후인 달려간 곳도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출마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공화당 전당대회였다. FT는 이를 두고 “나바로 고문이 어떻게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왕족’이 됐는지를 보여주는 순간”이라고 평했다.
저서에 허구인물 인용도…강경 매파
1949년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 출신인 그는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를 거쳐 어바인 캘리포니아대 교수로 재직했다.
처음부터 그가 공화당원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92년 샌디에이고 시장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실패 후 1996년 민주당 소속으로 캘리포니아 49대 하원의원 선거에도 나섰지만 그 때도 고배를 마셨다. 1996년 민주당 전당대회 당시 무대 위에 올랐던 나바로 고문은 사회보장, 여성의 생식권(낙태권), 친환경 정책 등에 대한 지지를 표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오가던 그가 공화당으로 완전히 돌아선 건 2016년 대선 당시였다. 그는 공화당 대선 후보로 출사표를 던진 트럼프 캠프에 초기 멤버로 합류했다. 두 사람은 미국 정치 엘리트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신념에서 공통점을 찾았다.
그는 2018년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중국은 세계 경제의 기생충”이라고 발언하는 등 중국 매파로 유명하다. 경제학자로서 나바로 고문은 1984년 저서에서 자유 무역을 지지하며 “관세는 소비자에게 해를 끼친다”고 주장하는 등 한때 주류에 속했다. 그는 1990년대 들어 각종 저서를 통해 NAFTA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2000년대부터 중국에 대한 격렬한 발언을 내뱉는 극단적 보호무역주의자가 됐다.
한편 그는 ‘다가오는 중국 전쟁’(2006), ‘중국이 세상을 지배하는 날’(2011) 등 다수 저서에서 “중국 음식을 먹으려면 미쳐야 한다”, “오직 중국인 만에 가죽 소파를 산성 욕조로 바꿀 수 있다” 등 ‘론 바라’라는 중국 전문가를 인용했다. 2019년 뒤늦게 해당 인물은 허구임이 밝혀졌다. 가상 인물을 통해 중국에 대한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는 지적에 대해 나바로 고문은 “영화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는 것과 같다”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