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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의 숨은 배경 ‘법률 접근성’
많은 사람들이 한글 창제를 단순히 문화적 업적으로만 알고 있지만, 세종대왕이 1443년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한 배경에는 ‘법률 접근성’이라는 사법적 목적이 있었다. 세종대왕은 ‘한문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으로 표현된 다수의 서민이 재판에서 억울한 자신들의 뜻을 펼칠 수 있게 하려고’ 한글을 만들었다.
당시 백성들은 한문으로 된 법전의 내용을 알지 못해 법령을 위반해 처벌받는 경우가 많았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죄를 모르고 범하는 잘못으로 인해서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 체계를 창제했다. 이는 법령의 홍포(弘布, 널리 알림), 즉 효과적인 법령의 고지를 통해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고 백성의 편안한 생활을 보장하고자 한 민본주의적 조치였다.
한자를 우리말 형식으로 표기하는 이두(吏讀)를 써서 한자로 된 법전을 역주하는 등의 노력도 있었으나, 이두는 점차 백성들과 간극이 벌어지고 서리(하급 관리)층의 전문용어로 굳어졌다. 따라서 세종은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최소한의 금령(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만이라도 어기지 않도록 새로운 문자를 창제했던 것이다.
“억울함이 없는 판결”…세종대왕의 재판 원칙
이 교지에는 “재판관이 사심을 비우고 정밀하게 재판에 임하며, 자신의 고집이나 평소 남에게 들은 편견을 그대로 믿거나 무조건 따르지 않는 부동심을 유지하는 가운데, 오래된 인연이나 연고에 얽매이지 말고, 피의자에게 너무 빨리 자백을 강요하면서 무리한 고문을 가하지 말고, 여러 방면으로 합리적으로 따져보고 되풀이하여 질문함으로써 답을 찾아가라”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세종대왕은 수령(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들이 이 교지의 골자를 목판에 새겨서 관아의 벽에 걸어놓고 모든 재판의 원칙으로 삼도록 했다.
“법 있어야 처벌 가능” 죄형법정주의의 선구자
세종대왕은 현대 형법의 기본 원칙인 ‘죄형법정주의’를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 1436년 사헌부가 “귀신을 공중으로 불러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처벌해야 한다”고 건의했을 때, 세종대왕은 “사건에 앞서 금지하는 법을 세우지 아니하고 갑작스레 하루아침에 법으로 처치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면서 먼저 금지 법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처럼 죄형법정주의 의식은 사헌부 관리 안순(安純)의 사례에서 보듯이, 국왕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서도 나타났다. 이는 세종대왕의 법치주의가 당시 조선 사회에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법 앞의 평등…“국왕도 법 아래에 존재”
세종대왕은 “법은 천하의 공기(公器,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이용하는 도구)로 국왕도 법 아래에 존재해 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는 법치주의 원칙을 실천했다. 국왕이 법의 집행자임과 동시에 법을 준수해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법 앞의 평등’ 원칙과 상통한다.
세종은 자신이 법에 구속된다고 생각했고, 백성의 민심을 얻고 왕조의 기반을 안정화하기 위해 편의주의, 엄벌주의 등을 최대한 억제하려 했다. 그는 백성에 대한 남형(濫刑), 오형(誤刑), 체옥(滯獄), 죄수학대(罪囚虐待) 등의 비위행위를 단속하고 저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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