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조업이 아직 세계를 호령하던 2000년대 초반, 국내 굴지의 대그룹 일본 법인장 J씨가 털어놓은 푸념에는 소니의 푸대접에 대한 섭섭함이 가득했다. 도쿄 도심에 번듯한 사옥을 마련한 것을 기념해 간담회 자리를 만들었다는 그는 “이제는 우리도 일본 기업들과 겨뤄볼 만하다”는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브라운관에 얽힌 씁쓸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듯했다. 자신의 말이 기사화되면 곤란하다고 판단했는지 “쓰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대화는 뇌리에 생생하다. 바닥을 모른 채 추락한 일본 전자업계의 패퇴와 약진을 거듭한 한국 전자업계의 성공 신화를 대비하는 소식을 접할 때는 특히 더 또렷해진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정서는 친일, 반일로 극명하게 엇갈린다, 윤석열 정부라면 거품을 물고 비난을 퍼붓는 이들에게 한일 관계 정상화는 굴욕적인 매국 행위다. 강제징용 근로자 문제 해법을 제시했던 문희상 전 국회의장조차 윤 정부의 대일 외교가 “가져다주기 바빴다 ”고 가시 돋친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가 문재인 정부 시절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일 관계를 더이상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편에 섰던 사실을 감안하면 친일, 반일 정서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일본 따라잡기’‘ 극일’ 같은 건설적 단어는 식민지배의 피해와 치욕을 잊지 못하는 반일 정서 앞에 그저 사치스러운 표현일 뿐이다. ‘가까운 이웃’이라는 평화적 수사도 시나브로 ‘타도’ ‘복수’ 등의 섬뜩한 말로 바뀌기 일쑤다.
한국 TV 역시 언젠가는 일본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메이드 인 재팬’을 무릎 꿇린 전자업계의 저력은 놀랍다. 일본 주재원들의 귀국 이삿짐 보따리마다 들어있던 일제 TV들을 필요없는 물건으로 밀어낸 우리 기업들의 도전, 모험 의지와 노력이 자랑스럽다. 혐일, 반일을 입에 달고 산 정치인들이 국민 손에 쥐여준 것이 무엇인지 따져볼수록 기업들의 ‘일본 추월’ 진가는 더 높이 대접받아야 마땅하다. 끝으로 사족 하나. 더불어민주당이 ‘성장’을 외치며 연일 ‘우클릭’ 제스처를 보내고 있지만 이를 믿을 기업이 얼마나 될까. ‘주52시간 근무 예외’ 조항 도입 하나를 놓고도 수개월째 퇴짜를 놓는 몽니를 계속하는 한 기업인들의 불안과 의구심은 걷히지 않을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