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득 칼럼]소니 브라운관과 한국 TV의 일본 추월

  • 등록 2025-02-14 오전 5:00:00

    수정 2025-02-14 오전 5:00:00

“말도 마세요. 소니가 얼마나 콧대가 높은지 과장급 직원 얼굴 보기도 쉽지 않더라고요. 눈도장이라도 찍으려고 그 회사 로비에서 뻗치기도 해봤지만...서울 본사에서는 소니 브라운관을 수입해 오라고 다그치는데 상담은커녕 만나기도 쉽지 않으니..”

일본 제조업이 아직 세계를 호령하던 2000년대 초반, 국내 굴지의 대그룹 일본 법인장 J씨가 털어놓은 푸념에는 소니의 푸대접에 대한 섭섭함이 가득했다. 도쿄 도심에 번듯한 사옥을 마련한 것을 기념해 간담회 자리를 만들었다는 그는 “이제는 우리도 일본 기업들과 겨뤄볼 만하다”는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브라운관에 얽힌 씁쓸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듯했다. 자신의 말이 기사화되면 곤란하다고 판단했는지 “쓰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대화는 뇌리에 생생하다. 바닥을 모른 채 추락한 일본 전자업계의 패퇴와 약진을 거듭한 한국 전자업계의 성공 신화를 대비하는 소식을 접할 때는 특히 더 또렷해진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정서는 친일, 반일로 극명하게 엇갈린다, 윤석열 정부라면 거품을 물고 비난을 퍼붓는 이들에게 한일 관계 정상화는 굴욕적인 매국 행위다. 강제징용 근로자 문제 해법을 제시했던 문희상 전 국회의장조차 윤 정부의 대일 외교가 “가져다주기 바빴다 ”고 가시 돋친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가 문재인 정부 시절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일 관계를 더이상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편에 섰던 사실을 감안하면 친일, 반일 정서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일본 따라잡기’‘ 극일’ 같은 건설적 단어는 식민지배의 피해와 치욕을 잊지 못하는 반일 정서 앞에 그저 사치스러운 표현일 뿐이다. ‘가까운 이웃’이라는 평화적 수사도 시나브로 ‘타도’ ‘복수’ 등의 섬뜩한 말로 바뀌기 일쑤다.

하지만 기업들로 범위를 좁혀놓고 본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세계 무대에 슬금슬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후 한국 기업들에게 대다수 일본 기업과 경제는 벤치마킹 모델이자 넘어서야 할 벽이었다. 길 안내와 협력자 역할을 마다않은 일본 기업들도 많았지만 버거운 경쟁자요, 추격 대상인 회사들이 훨씬 더 많았다. 꺾거나 제쳐야 할 곳이 수두룩했다. 전자, 철강, 조선, 자동차, 건설 등 한국 경제의 도약기를 이끌었거나 현재와 미래의 먹거리가 된 업종일수록 일본 기업들은 철옹성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과 블룸버그 등 외신이 전한 일본 TV의 몰락 소식은 흥미롭다. 소니와 함께 일본 전자업계를 대표했던 파나소닉이 TV 판매를 시작한 1952년 이후 73년 만에 사업 포기를 검토 중이라는 것이다. 외신은 브라운관 TV 시절 세계를 쥐락펴락했던 일본 업체들이 LCD TV로 시장 주도권이 넘어간 2000년대 이후 한국 기업들의 눈부신 기술 진보와 공세에 휘말려 쇠퇴의 길을 걸었다고 전하고 있다. 작년에는 저가격을 앞세운 중국산 TV가 사상 처음으로 일본 시장 점유율 50%를 넘기며 일본 TV들을 안방에서도 찬밥 신세로 만들었다는 소식도 곁들였다. 전자 왕국 일본의 또 다른 수모다.

한국 TV 역시 언젠가는 일본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메이드 인 재팬’을 무릎 꿇린 전자업계의 저력은 놀랍다. 일본 주재원들의 귀국 이삿짐 보따리마다 들어있던 일제 TV들을 필요없는 물건으로 밀어낸 우리 기업들의 도전, 모험 의지와 노력이 자랑스럽다. 혐일, 반일을 입에 달고 산 정치인들이 국민 손에 쥐여준 것이 무엇인지 따져볼수록 기업들의 ‘일본 추월’ 진가는 더 높이 대접받아야 마땅하다. 끝으로 사족 하나. 더불어민주당이 ‘성장’을 외치며 연일 ‘우클릭’ 제스처를 보내고 있지만 이를 믿을 기업이 얼마나 될까. ‘주52시간 근무 예외’ 조항 도입 하나를 놓고도 수개월째 퇴짜를 놓는 몽니를 계속하는 한 기업인들의 불안과 의구심은 걷히지 않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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