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위기에 강했던 '가치투자 대가'…코로나에 물러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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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대표직 사임…신임에 이석로 한국투신운용 부사장
이 대표 "성과 만회 후 나오려 했지만 더 늦으면 안 돼 결심"
"지배구조 문제, 주주환원율 낮은 등 국내 문제 해결해야"
허남권 대표와 가치투자 '거목'…'K-펀드' 수익률 435%
"'이채원' 브랜드에 투자해 환매 클 수도…가치주 하락 가능성"
  • 등록 2020-12-09 오전 3:30:00

    수정 2020-12-09 오전 3:30:00

[이데일리 고준혁 기자] 이채원 한국밸류자산운용 대표가 사임한다. 공모주 펀드 불황이 수년간 이어진 가운데, 코로나19란 쓰나미가 가치주를 휩쓴 상황이 20년 이상을 버텨온 가치투자의 ‘큰 산’도 물러나게 한 셈이다. 최근 백신 개발 기대감에 가치투자의 분위기가 반전되는 상황이라, 업계에선 이 대표의 사임은 다소 이른 게 아니냐는 아쉬움이 표출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가치 투자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저무는 상징적 사건으로도 평가된다.

이채원 한국밸류자산운용 대표[사진=이데일리 노진환 기자]


이 대표 “상황 안 좋을 때 환매·저조한 주주환원률 등 한계점”

8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이채원 대표는 오는 11일 한국밸류자산운용 대표에서 물러난다. 신임 대표로는 이석로 현 한국투자신탁운용 부사장(최고운영책임자)이 부임한다. 일선에서 물러난 이 대표는 당분간 휴식을 취하면서 한국밸류자산운용 고문으로 남아 조언자 역할을 할 예정이다. 운용사의 1등 공신인 만큼 향후 한국투자금융그룹 내에서 직책을 맡게 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이 대표는 “2~3년 전부터 이제 후배들을 위해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는 고민을 해오던 부분이 있었다”며 “가치 펀드의 투자 성과가 부진하다 보니 이를 어느 정도 만회한 후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는데, 이를 물려줄 기간을 더 늦추기에는 시기가 안 맞을 거 같아 결정하게 됐다”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어 “그간 장기 가치투자를 지향하면서 시장 문화나 구조를 바꿔보려고 했다”며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사고 좋을 때 파는 게 맞는데 그 반대로 나쁠 때 환매가 나고 좋을 때 들어와 부담되는 어려움이 있었고, 지배구조 문제나 주주환원율이 글로벌 기준보다 낮다는 점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이어져 가치주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짧은 소회를 전했다.

허남권 대표와 가치투자 양대산맥…‘K-펀드’ 누적수익률 435%

이 대표는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대표와 함께 국내 가치투자의 양대산맥으로 불린다. IT버블 시절 동원투신운용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할 당시 소신을 지키려 한 달간 병원에 입원했던 일은, 그가 지닌 투자 대한 신념이 얼마나 강한지를 엿볼 수 있는 유명한 일화다. 당시 다음커뮤니케이션과 새롬기술 등 IT 관련주가 무려 100배에 가까운 성장을 보이면서 편승해야 한다는 고객들의 강한 항의에 이 대표는 한 달간 병가를 내고 병원에 드러누웠다. 2000년대 초 IT버블은 꺼졌고, 결국 이 대표의 판단이 옳았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이채원’이란 브랜드를 시장에 각인시킨 건 IMF 시절 ‘동원밸류 이채원 펀드’의 출범이다. 설정 1년이 채 안 된 시기에 수익률 130%를 기록했다. 당시 삼성전자(005930)SK텔레콤(017670), 롯데칠성(005300), 유한양행(000100) 등 주가수익비율(PER)과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은 주식을 편입한 덕이다.

2000년 동원증권의 고유계정으로 론칭한 ‘K-펀드’를 운용하며 6년간 누적수익률 435%를 올렸다. 같은 기간 코스피 수익률이 56%였던 것과 비교하면 경이로운 수준이다. 2006년부터는 한국밸류의 대표 펀드인 ‘한국밸류 10년투자 수식펀드 1호’를 내놓고 장기투자와 기치투자의 미덕을 시장에서 증명해 냈다.

강대권 유경PSG자산운용 책임투자자(CIO)와 김민국·최준철 VIP자산운용 대표, 홍진채 라쿤자산운용 대표와 최웅필 전 KB자산운용 상무 등 국내 스타급 펀드 매니저들의 스승으로도 불린다.

[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가치주 반등 상황이라 아쉽단 평가…허 대표 “시장 변곡점서 큰 역할 했다”

가치투자는 올해 코로나19를 맞이해 최악의 부침을 겪고 있다. 대표적인 미국의 성장주 상장지수펀드(ETF)인 뱅가드 그로스(VUG)가 올초 대비 지난 7일(현지시간) 36.1% 상승한 반면, 가치주 ETF인 뱅가드 밸류(VTV)는 같은 기간 1.2% 하락률을 나타내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가치주 주식형 펀드에 강점을 지닌 한국밸류자산운용의 규모는 점차 쪼그라들고 있다. 회사 영업보고서에 따르면 공·사모를 포함한 전체 펀드설정액은 지난 2014년 말 5조7941억원으로 정점을 기록한 뒤 올해 3분기 말 기준 2조7627억원까지 매년 축소됐다.

이 대표의 사임 소식에 앞서 최웅필 전 KB자산운용 밸류운용본부장과 이하윤 전 마이다스에셋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 정광우 전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차장 등도 사표를 낸 바 있다. 올해 초 번진 동학 개미운동으로 직접투자가 폭발적으로 느는 등에 펀드 자금 유출이 더 가속화한 데 따른 현상이다. 이 대표의 사임도 이러한 조류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코로나19 백신 개발 소식과 함께 가치주의 반등이 점쳐지는 상황이라, 이 대표의 사임은 안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웅필 전 본부장은 “장기투자를 하면 단기간 힘든 구간에 있을지라도 보답해주는 기업들이 있는데, 시장이 외면하는 상황에서 이채원 대표가 마음고생을 크게 했을 것”이라며 “5년 넘게 쉬고 있는 가치주의 재평가가 최근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라 사임이 아쉽다”고 말했다.

가치 투자 시장의 또 다른 거목이자 25년 지기인 허남권 대표도 큰 아쉬움을 드러냈다. 허 대표는 “이 대표의 사임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고 또 시장의 대표 선수 한 명이 퇴장하는 데 애석한 마음이 있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진행될 일로 조금 빨리 왔을 뿐이라고 추스르고 있다”며 “국내 주식시장의 변곡점마다 큰 역할을 해줬고 지금도 충분히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니, 시장의 오피니언 리더로 남아 줬으면 한다”라고 전했다.

한편 이채원 대표가 투자업계에서의 상징성이 큰 만큼 관련 펀드 환매로 인해 경기민감 업종들의 하락이 있을 수도 있단 전망도 나온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거꾸로 보면 성장주의 약진이 올 한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느낄 수 있는 사건”이라며 “이채원이란 브랜드를 보고 투자한 투자자들이 펀드를 환매할 수 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클 수 있어, 펀드에 담겨 있던 종목들까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라고 관측했다.

◇약력

△1989.02 중앙대 경영학과 졸업 △2014.02 중앙대 대학원 경영학과 졸업 △1988.12-2006.01 한국투자증권(옛 동원증권) 주식운용부 △2006.02-2019.12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최고투자책임자(CIO) △2018~2020.12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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