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영 법무법인 원 변호사]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한 많은 이들이 문제 제기 이후 또 다른 벽을 마주한다. 문자, 녹취, 목격자 진술 등 객관적 증거가 충분함에도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받고 더 큰 좌절을 겪는다. 신고 창구는 존재하지만 실질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지금도 많다.
 | | 강서영 법무법인 원 변호사. (사진=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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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괴롭힘 사실을 인지하면 지체 없이 조사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실무에서는 조사 주체가 곧 사용자 자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가 동시에 ‘조사의 판정자’가 되는 구조에서는, 특히 가해자가 팀장이나 임원 등 조직 내 권력자일 경우 인사부서나 조사위원들이 압박을 받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이러한 왜곡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이나 조직 역량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규모가 크고 외부 이미지에 민감한 기업일수록 사건을 개인 간 갈등으로 축소하고자 하는 유인이 크다. 괴롭힘이 구조적 문제로 비화할 경우 평판 리스크와 경영진 책임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회피적 대응은 오히려 더 큰 리스크를 낳는다. 피해자는 언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산업재해 신청 등을 통해 문제를 외부에 알리고, 이는 조직 전체의 위기로 비화할 수 있다.
실제 법률 자문 현장에서도 내부에 다수의 객관적 증거가 축적되어 있음에도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반복되는 사례를 적잖게 접한다. 조사 실무자가 ‘당사자 간 해석 차이’ 또는 ‘판단 기준의 모호성’을 이유로 결론을 유보하는 경우도 많고, 조사 대상자가 조직 내 영향력 있는 인물일 경우 조사가 형식에 그치는 일도 있다. ‘사규에 따른 절차는 진행됐다’는 형식 논리로 책임을 회피하는 접근은 피해자의 권리 회복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조직 구성원 전체의 신뢰 기반을 무너뜨린다.
괴롭힘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행위는 결코 모호하지 않다. 반복적인 모욕, 위협, 고립, 감정노동의 강요 등은 분명하고 실체적인 현실이다. 괴롭힘 행위가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경우라면 사용자는 반드시 해당 가해자에 대해 인사조치·징계 등 실질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를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조사 의무를 방기하는 것으로, 사실상 2차 가해로 이어질 수 있다.
직장 내 괴롭힘 대응은 이제 신고와 절차를 넘어 실질적인 진실 규명과 피해 회복, 조직의 책임 이행까지 나아가야 한다. 필자는 내부조사 프로세스를 설계하거나 자문할 때 조사 개시 기준과 면담 방식, 조사자의 독립성 확보, 피해자 보호조치의 단계적 실행 여부 등을 매우 정교하게 점검한다. 조사 매뉴얼이 있다고 해서 실효성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며, 실제 조사를 수행하는 주체의 권한과 역할, 회사 내 의사결정 구조와 연결되어 있어야만 작동한다는 점을 수차례 경험으로 확인해왔다.
괴롭힘 대응 제도는 단지 규정을 고치는 일로 완성되지 않는다. 조직의 의사소통 구조, 권한 배분, 문제 제기 및 처리 흐름까지 전반적인 시스템이 조율되어야 예방이 작동한다. 특히 기업별로 조직문화와 리스크 요인이 다른 만큼 외형적 규정을 일률적으로 이식하기보다 조직 특성에 맞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실효성 있는 예방의 출발점이다. 제도의 진정한 효과는 결국 구조의 설계 방식에서 갈린다.
■강서영 변호사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변호사시험 2회 △캘리포니아대 어바인 로스쿨 방문학자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연구원 책임연구관 △(현)부산여성가족과 평생교육진흥원 자문위원 △(현)보건복지부 고문변호사 △(현)법무법인 원 소속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