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기 한국산업연합포럼 회장] 최근 노동부는 신정부의 주 4.5일제 공약 이행 일환으로 주 4.5일제를 도입해 근로시간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으로 줄이는 로드맵을 보고했다고 한다. 우리 경제 위상에서 오는 자신감의 표현일 것이다. 주당 36시간 근로로도 우리 경제가 세계 10위권을 유지하고 1인당 소득도 7만달러 수준으로 오른다면 좋은 일이다. 다만 이는 고부가가치 산업이 뒷받침돼야 가능할 것이다.
현재 세계 최고 수준 소득과 30시간 내외 주당 근로시간의 여유를 누리는 나라는 유럽의 중·소국이다. 덴마크는 법정근무시간은 없으나 주당 실제근로시간은 2023년 OECD 자료에 의하면 26.5시간이다. 짧은 근로시간에도 불구하고 국제통화기금(IMF)에 의하면 명목 1인당 소득은 6만9273달러, 구매력 평가 기준은 8만3454달러에 이른다. 룩셈부르크는 법정근로시간은 주당 40시간이지만 실시간은 OECD 기준 28.3시간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23년 세계은행 추정 구매력 평가 기준 13만9466달러다. 스위스도 법정근로시간은 없으나 실제 시간은 29.4시간이다. 명목 1인당 GDP는 2024년 IMF의 추정에 의하면 10만6098달러다. 네덜란드는 법정근로시간은 1일 최대 12시간, 1주 최대 60시간, 4주 평균 1주당 최대 55시간, 16주 평균 주당 최대 48시간이지만 실근로시간은 OECD 기준 27.4시간이다. IMF에 따르면 2024년 1인당 명목 GDP는 7만480달러, 구매력 평가 기준으론 8만3820달러에 이른다.
짧은 근로시간에도 불구하고 1인당 7만 달러 이상 고소득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이들은 고부가가치 산업에 특화한 점이다. 스위스 제약·금융, 룩셈부르크 국제금융, 네덜란드 첨단 농식품 기술 등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는 좁은 국토에도 불구하고 첨단 농업·식품 기술에 힘입어 미국에 이은 세계 제2위 농식품 수출국이 됐다. 스마트팜, 정밀농업, 수경재배 등 고부가가치 기술 중심으로 산업을 발전시켜 왔다. ASML, NXP 반도체(NXP Semiconductors)로 대표되는 반도체와 전자 장비 산업, 유럽 최대 무역항인 로테르담 등 물류·항만 산업, 생명과학·헬스케어, 정밀화학 산업 등이 고부가가치를 선도하고 있다.
룩셈부르크는 금융·자산운용·펀드 비즈니스, 철강산업과 중공업, 정보통신기술(ICT)·위성·통신, 헬스케어·우주기술 산업 등이 고부가가치에 합류하고 있는 바, 이들 국가의 정책 노력도 주목해볼 만하다. 법인세 명목세율은 유럽 평균 24% 수준이나 효율적 세제 감면과 조세 협정망을 통해 실효세율을 낮추고 지주회사 구조와 예비대체투자펀드(RAIF), 유럽공모펀드투자지침(UCITS) 등 유럽 투자펀드 법제 활성화 등을 통해 글로벌 금융자산과 펀드, 본사 등 유치에 성공했으며 외국인 고급인재 노동허가 간소화 등으로 고생산성 인력 수급 구조를 형성했고 법인 설립 소요시간 평균 3일 등 기업친화적 비즈니스 환경도 구축했다. 고소득 구조는 조세, 규제, 인력, 산업전략을 효과적으로 설계한 정책적 결과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단위당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은 고숙련 기술자 중심으로 지식·기술 집약적이고 국제적 시장 확장성이 높으며 특허나 지식재산권(IP)으로 제품 혹은 서비스의 독점적 성격을 갖고 있다. 자본집약·디지털화로 인한 시간당 생산성 극대화도 중요하다. 같은 시간 투입으로 일반 제조업보다 2~4배 이상 GDP 창출이 가능하다. 근로시간 단축에 있어 중요한 것은 법적 의무화가 아니라 고부가가치 산업 확산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 최근 투자가 위축되고 있고 보호주의에 따라 미국 등 해외 산업 이전이 가속화하고 있다. 고부가가치 산업 뒷받침 없는 주 4.5일제 도입은 경쟁력을 낮춰 우리 경제를 후퇴시킬 우려도 있다. 차세대 반도체, 미래차, 생명공학, 바이오, 인공지능(AI), 청정수소나 소형모듈원전(SMR), 첨단소재 등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을 4.5일제 도입과 최소한 병행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불투명하다. 신정부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