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희 법무법인 디엘지 대표변호사] 누구나 싫어하는 게 있기 마련이다. 뜨겁지 않은 우유로 만든 라테를 싫어하고 차가운 식전 빵도 싫어한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 대단치 않은 것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싫어하는 마음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먼 여행에서 돌아온 딸아이와의 식사라면 미지근한 라테가 나오든 식은 빵이 나오든 무슨 대수랴. 싫어하는 대상이 사람이 되면 미움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누구나 미워하는 사람 몇은 있다. 미움이라는 감정이 복잡미묘함은 자식에게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렇게 밉다가도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미움은 잦아든다. “그래, 그럼 그렇지”하며 관계의 편안함을 회복한다. 밥 한 끼 술 한 잔에 미움은 우정으로, 신뢰로 옮겨간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가변적이다. 그래서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행복이라는 대세에 큰 지장은 없다. 싫은 게 있어야 좋아하는 게 있고 미움이 있어야 사랑도 있는 것이니.
그런데 ‘증오’는 다르다. 다른 차원의 감정이다. 매우 근원적이고 지속적이고 강렬하다. 쉽게 변하지 않고 마음에 고착되는 경향이 있다. 감정만으로 머무르지 않고 폭력이나 실력 행사까지도 불사하게 한다. 증오는 대개 개인보다는 집단을 향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증오는 위험하다. 개인이든 사회든 증오가 있다면 심각한 상황이다. 증오에는 자기파괴적인 성질이 있어 증오가 심하면 개인이든 사회든 피폐해질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의 증오 지수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일상에서의 발언 수위가 더 강해진다. 공격적 표현의 수준은 오래 알아온 사람이 맞나 싶을 때가 있을 정도다. 대개는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한 증오이지만 여기에 세대간, 성별간의 증오까지 가세한다. 가히 ‘증오사회’라고 부를 수 있겠다. 미움을 넘어 증오에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증오의 대상에 대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증오 감정에 대한 논리적·이념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증오 표현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는 나치 전범인 루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관한 기록이다. 재판을 취재하면서 관찰한 것은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며 대단한 광기를 가지고 유대인을 죽인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당연한 것조차 생각하지 않게 만든 것이 그를 살인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이념화한 증오가 평범한 개인의 도덕이나 윤리를 마비시키고 범죄로까지 나아가게 만든다고 봤다. 이것이 바로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다. 왜 어떤 사회에서는 증오가 그렇게 쉽게 퍼지는가. 아렌트는 증오가 정치적으로 동원되고 제도화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갈등의 상황이 이기고 지느냐의 문제로 환원될 때 갈등은 이내 전쟁이 되고 만다. 이기는 것이 절체절명의 목표가 되고 나면 증오의 정치가 동원된다. 상대에 대한 증오만큼 우리 편을 강하게 결속하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영화 ‘콘클라베’의 한 장면이다. 교황 선출을 둘러싼 추기경들의 갈등과 긴장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로렌스 추기경은 명확하고 강경한 입장을 요구받는다. “이건 콘클라베입니다. 전쟁이 아니에요.” 로렌스 추기경은 말한다. 그러자 벨리니 추기경은 언성을 높이며 “전쟁입니다. 단장님도 한쪽 편에 서셔야 하고요”라고 한다. 교황을 선출하는 가장 신성한 절차조차 때로는 전쟁으로 여겨진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상대를 죽이든 내가 죽든 한 가지 결론밖에 없다. 증오는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다.
다행인 것은 종종 증오의 시기가 있기는 했지만 증오가 인류 역사를 지배하지는 않았다. 아렌트가 비판했던 ‘무사고’의 인간보다 스스로 사고하고 존엄성을 향해 행동하는 인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비록 극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추기경들의 박수를 받으며 차기 교황이 선출된 것은 문제를 인정하고 스스로 후보에서 물러난 추기경들이 있었고 여전히 콘클라베라는 절차를 통해 신께서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가 않을까. 증오하기 전에 나의 확신에 대해 다시 사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한번은 의심해 보는 것이다. 긴 민주주의의 역사와 우리 선조가 만든 제도의 틀을 존중하는 것이다. 설령 내가 지더라도 넘지 않아야 할 선을 스스로 지켜 가는 것이다.
로렌스 추기경은 저마다의 확신이 화합과 관용을 해칠 수 있으며 의심과 성찰이 공동체의 건강한 결정을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의심 없는 확신은 관용의 가장 치명적인 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