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한전진 기자]
“인공지능(AI)은 기술이자 동료입니다. 연구원에게 시간을 돌려주는 도구이자, 글로벌 시장에서 기술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서병휘 아모레퍼시픽(090430) R&I센터장(CTO·최고기술책임자)은 최근 서울 용산 본사에서 이데일리를 만나 이같이 말했다. 그는 “한국인 피부에 대해선 아모레퍼시픽이 가장 잘 안다”면서도 “앞으로 글로벌 고객을 상대하려면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고, 더 빠르게 실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AI는 자동화 수단이 아니라 연구의 깊이와 속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핵심”이라고 짚었다. R&I센터는 피부과학·바이오 기술을 중심으로 제품 개발 전반을 맡는 아모레퍼시픽의 핵심 연구소다.
 | | 서병휘 아모레퍼시픽 R&I센터장(CTO·최고기술책임자). R&I센터는 피부과학·바이오 기술을 중심으로 제품 개발 전반을 맡는 아모레퍼시픽의 핵심 연구소다. (사진=한전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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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은 지난 9월 ‘크리에이트 뉴뷰티’를 비전으로 내세우고, AI 전환을 포함한 5대 중장기 전략을 발표했다. 글로벌 사업 비중을 70%까지 끌어올리고, 바이오·AI 기반 혁신을 신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서 센터장은 “아모레의 전신인 태평양이 내걸었던 ‘미래 창조’ 기술 철학은 지금도 유효하다”며 “하지만 시장은 이제 글로벌로 확장됐고, 민첩성(Agility)이 핵심인 시대가 열렸다. 여기에 대응할 가장 강력한 수단은 70년 넘게 축적한 피부 데이터를 학습한 ‘아모레의 AI’”라고 강조했다.
대표 사례는 지난 8월 유럽접촉피부염학회(ESCD) 국제학술지에 등재된 ‘AI 기반 피부 자극 자동 진단 기술’이다. 아모레퍼시픽은 8만 3000여건의 피부 패치 테스트 이미지를 기반으로, 최신 딥러닝 알고리즘 YOLOv5x를 적용해 자극 반응을 0~4점으로 자동 판별하는 모델을 개발했다. 무자극(0점) 판단의 민감도는 99.7%, 전체 정확도는 98.3%에 달한다. 기존에는 숙련된 연구원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평가했지만, AI는 동일한 기준으로 수천 건의 데이터를 빠르고 일관되게 진단할 수 있다. 제품 개발 속도는 물론, 글로벌 임상 대응에도 탄력이 붙을 수 있다는 평가다.
서 센터장은 “아모레퍼시픽은 십수년 전부터 데이터를 단순한 기록이 아닌 ‘자산’으로 정의했고, 이를 AI가 학습할 수 있는 형태로 디지털화했다”며 “예전엔 평가 이미지가 단순히 저장만 됐다면, 지금은 AI가 학습하고 스스로 판별하는 연구 자원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는 “AI는 이제 실험 결과를 판별하는 도구를 넘어, 원료부터 소비자 경험 설계까지 연구 전반에 내재된 플랫폼”이라고 강조했다.
 | | 서병휘 아모레퍼시픽 R&I센터장. (사진=한전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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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아모레퍼시픽은 AI 기반 효능 분석 모델 ‘닥터 아모레’를 통해 주름·잡티 개선 효과를 정량화하고 있다. 또 정밀한 분자 설계가 필요한 고기능성 신소재, 펩타이드 개발에도 AI를 적용하고 있다. 펩타이드는 피부 재생과 탄력 개선에 효과가 있는 생체 유래 단백질 조각이다. 바이오 기술 경쟁력의 핵심 소재로 꼽힌다. 모바일 앱(애플리케이션)과 매장에서는 AI 기반 기술(톤워크)을 활용해, 사용자가 스스로 피부톤을 진단하고 가상 메이크업까지 받을 수 있는 기능을 구현하고 있다.
글로벌 대응을 위한 AI 학습 구조도 진화하고 있다. 서 센터장은 “한국인 피부에 대해선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지만, 이제는 다양한 인종과 환경, 각국의 규제에 맞춰 대응할 수 있는 데이터와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컨대 유럽, 미국, 아시아 국가마다 화장품 성분 표시나 라벨링 기준이 모두 다른데, AI가 이를 학습해 각국 규정에 맞춘 라벨을 자동 설계하고 출력할 수 있는 체계를 시행하는 식이다.
서 센터장은 아모레퍼시픽의 AI 전략을 ‘동료’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그는 “현재 R&I센터에는 국내외 약 500명의 연구원이 있고, 각자에게 AI가 붙으면 1000명이 일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며 “이는 단순한 효율 향상이 아니라, 연구 생산성과 창의성, 글로벌 대응력까지 함께 끌어올리는 전략 자산”이라고 말했다. 이어 “AI가 루틴 업무를 맡고, 연구원은 본질적인 고민과 실험에 집중하는 구조가 진짜 혁신의 출발점”이라고 덧붙였다.
서 센터장은 “R&I센터는 건강한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기술의 출발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의 기술 철학은 사람 몸의 본래 힘을 끌어올리는 바이오 기반 기술에 있으며, 이를 스킨케어·이너뷰티·두피·디바이스 등 다양한 솔루션과 연결하는 것이 뉴뷰티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술은 고객과 만날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며 “AI는 사람을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더 나은 제품과 경험을 함께 설계하는 진짜 ‘동료’”라고 강조했다.